페스트 1&2 / 최수철 지음 / 문학과 지성 펴냄, 2005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3.5명 수준으로 OECD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문제는 자살증가 속도 역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합니다. 웰다잉이 화두로 거론될 정도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생각조차하고 싶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죽음이 이렇듯 전통적으로 기피대상이 되어온 것에 비추어 본다면 최근에 자살이 급증하고 있는 현상은 설명이 쉽지 않을 듯합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상영 선임연구위원과 서울여자대학교 경제학과 노용환 교수는 『우리나라의 자살급증원인과 자살예방을 위한 정책과제』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우리나라의 자살률 증가추세를 빨라지고 있는 인구고령화현상과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두 차례에 걸친 경제위기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경제적 위기로 사회적 좌절을 겪게 된 중장년층 남자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이 늘게 되었다고 해석하고 노년층의 경우 나이듦에 따른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나 심리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 역시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죽음에 선행하는 ‘사회적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曾煥棠(증환당)박사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사회와 맺었던 실질적 관계로부터 격리되거나 단절되는 현상을 일러 사회적 죽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林綺雲 외, 죽음학 209쪽) 개인이 겪는 사회적 죽음의 압력은 은퇴나 상실 같은 개인 적 상황도 있고 경제적 공황, 전쟁 및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문제 등 집단적 경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부녀자의 사회적 죽음은 주로 배우자의 사망 후 장기간의 고독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고,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환자의 경우 사람들로부터 접촉을 거절당하거나, 스스로를 격리시킴으로서 사회적 죽음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죽음상태로부터 실제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다양하게 설명되고 있다고 합니다.

인식의 기피대상인 되어온 죽음에 대한 담론이 조금씩 열리고 있는데 반하여 자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금기의 영역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죽음에 관한 글을 쓸 때 즐겨 인용하는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에서도 자살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1897년에 쓴 <자살론>은 자살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는 선구적인 연구라고 합니다. 뒤르켐은 자살을 “피해자 자신에 의해서 완수되는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행위로 인하여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죽음”이라고 정의하였는데, 그런가 하면 심리학자 슈나이드만은 나아가 “자아피괴의 의식적 행동의 하나이며, 자신에게 있어서 자살이 문제해결의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이해받기를 기도하는 행위”라고 정의하여 자살에 대하여 긍정적 시각을 내비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임기운 등, 죽음학, 307쪽).

자살을 설명한 많은 이론 가운데 뒤르켐의 이론구조가 가장 명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뒤르켐은 그때까지 심리적 문제로 간주되어 왔던 자살이라는 현상을 사회적 요인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자살이 비록 개인적인 행위이기는 하지만 한 개인의 자살 동기는 그가 속한 공동체와의 통합 정도에 의해 생겨난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다양한 인구집단, 즉 공동체에서의 자살율을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그러한 경향을 설명한 것입니다. 뒤르켐은 자살의 유형을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도로 통합된 공동체에서는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도 희생할 각오를 다지게 되는데, 삶과 죽음에 동등한 의미와 가치를 둔 결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선택하는 자살을 이타적 자살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이 상대적으로 느슨하여 개인주의 성향이 팽배해있는 사회에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타인의 평가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는 것인데, 개인의 위기를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극복할 수 없는 경우에 시도하는 자살을 이기적 자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자살이 사회적 규범이 지켜지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아노미성 자살은 지금까지의 가치관이나 사회규범이 혼란상태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경제적 위기에 처한 시기에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자살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사회의 규범이 혼란상태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으로 본다면, 사회적 차원에서의 해결방안을 시급하게 찾아야 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자살을 사회적 현상으로 읽어낸 최수철교수님의 2005년작 <페스트>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살이 우리사회의 문제적 이슈로 꿈틀거리기 시작할 무렵으로 폭발적인 사회현상으로 부각될 것을 예견한 선구적 작품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작가의 근작 <침대>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점입니다만, 그의 작품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의식의 해체, 엄정한 문체, 도저한 지적 사유라는 작가적 과제에 천착하고 있는 그의 스타일 때문일 것입니다. 페스트에서는 개인의 의식으로부터 사회구조로까지 분석대상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그런 의식의 꼬투리를 놓치지 않으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예 작품에 대한 작가의 변을 붙여두지 않은 소설도 적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만, 그래도 반쪽도 되지 않은 작가의 말에서 “앞으로 한동안 이 소설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페스트 2권 391쪽)”고 적은 것으로 보아 참으로 불친절한 작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독자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강요하지 않아 자유롭게 해석하도록 열어두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무런 수고도 필요 없도다. 지옥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일에는. 음침한 무덤의 문은 밤낮으로 열려 있기 때문. 그러나 위쪽으로, 천상의 밝은 대기로 되돌아가는 것은 고통의 길로 이어지리.(1권 9쪽)” 엽기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남자의 모습을 스케치하면서 이야기를 여는 첫 번째 장면에 등장하는 비르길리우스의 시귀는 이 소설이 다루게 될 자살이라는 화두에 대한 해답을 과연 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회의감이 우선하도록 만드는 절망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무망시에서 자살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이런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해가는 과정을 다루면서도 어떻게 보면 자살예방센터 OSP에 근무하는 센터 부책임자 강시우를 중심으로 하여 무수히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연결고리를 뒤쫓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기도 합니다.

무망시는 대한민국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도시일 것이나 그 위치를 추정해보면 행정구역상 동해안을 끼고 있고 도심이 해안으로부터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인 임서상의 칼럼에서는 북위 37° 03′ 45″ 동경 37° 03′ 45″ 에 자리 잡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위치는 터키의 내륙지방 어디에 해당되는 좌표일 것 같습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공식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북위 33° 06′ 32″에서 북위 43° 00′ 35″, 동경 124° 11′ 11″에서 동경 131° 52′ 31″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서상의 말대로 가상의 도시 무망시가 어디에 있는지 새삼 지구본을 들여다보며 지리적인 위치를 따져보는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지구상의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저 평범한 도시들 중 하나일 뿐(68쪽)”이기 때문입니다.

한자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시는 분들에게는 호재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임서상의 칼럼을 빌어 무망(務望)시의 이름이 ‘애써 바람’에 해당되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생각이 없다(無妄), 남을 속이다(誣罔), 희망이 없다(無望) 등의 뜻도 있음을 잊지 말아달라(无妄)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잊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무망시 자살예방센터 OSP에 근무하는 센터 부책임자 강시우와 사업2부 팀장 최동호가 최근 급증하고 있는 자살사건을 조사하여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따라가는데, 시립정신병원 정신과의사 한기형, 시립정신병원 부설 자살기도자 감화원의 신명인 연구원 등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어서 OSP가 지원하고 있는 무량주식회사의 자살방지약 신제품 설명회에서 설명회 책임자 김성수를 비롯하여 작가 임서상, 가수 진유열, 의사 한기형, 무용수 서문주, 영화감독 전치운, 목사 장신수 등이 차례로 등장하여 이야기의 흐름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렇게 등장한 인물들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확산되는 자살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인물들이 역시 다양한 이유로 죽음을 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야기의 초반에 시우와 함께 자살사건을 조사하던 동호가 장신수목사의 주례로 유정과 결혼식을 거행하면서 자살예방을 위한 캠페인 영상을 찍기도 하지만, 막상 중세에 페스트가 창궐했던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떠난 신혼여행에서 갑작스럽게 자살을 선택하는 미스터리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장신수 목사를 중심으로 자살예방을 위한 집단치유 모임, ‘우란강 기도회’가 설립되기도 하지만, 명상을 통하여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장신수목사와는 달리 수석관리자의 주도로 임사체험을 유도하기 위하여 물을 이용한 적극적 시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참가자가 죽음을 맞는 파국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논리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음악과 춤과 같은 예술적 접근을 시도하던 진유열과 서문주 등의 봉가산캠프의 시도 역시 사태를 우려한 당국의 개입으로 해산되고 이 과정에서 서문주가 죽음을 택하기도 합니다. 당국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적극적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자살자의 통계를 숨기는 등 소극적 대응을 하는 동안 무망시는 무정부상태로 돌입하면서 정부는 자살현상이 마치 페스트와 같은 급성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는 무망시를 외곽에서 봉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와 같은 흐름은 작가가 앞서 설명 드렸던 뒤르켐의 이론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종국에는 손을 놓고 있는 시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그동안 숨겨왔던 자살현상의 본질을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공감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집회, 이른바 ‘죽음의 파티’를 열게 됩니다. 광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집회에서는 건물 옥상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을 통하여 그동안 숨겨오던 죽음과 죽음의 현장, 죽음의 도구들 그리고 오열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광장에 모인 대중 앞에 나선 혜강스님의 설법이 인상적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당당하게 죽음을 대면해야 합니다. 삶의 끝에서 고결한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그 또한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 생명이란 끊임없이 타고 있는 불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이란 불 속에 쉬지 않고 장작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 우리의 몸을 불 속으로 던지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 마음의 불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합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의 영혼이 새로운 몸을 받아 새로운 옷을 갈아입도록 해야 합니다. (…) 우리는 마음의 불이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그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을 때, 비로소 죽음의 행진도 멈출 것입니다.(276-280쪽)”

작가는 서상을 빌어 이 작품의 성격을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픽션도 논픽션도 아니었다. 위기에 처한 한 사회의 드라마이자, 자살의 벼랑에 몰린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정밀한 보고서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그 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실상은 그 모두가 한 중심인물이 겪는 심리적 상황의 상징적 형상일 따름이었다.(334쪽)” 작가가 프로이트, 융, 성 아우구스티누스, 비르길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 푸코,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글과 함께 불교, 힌두교 경전 등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자살에 대한 작가의 종교적, 철학적 성찰을 마주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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