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한 중소기업 난립하면서 신약개발 토양마저 해쳐…"국내 적정한 제약기업 수는 63개"

▲ 지난 2011년 11월 18일 한국제약협회 주최로 장충체육관에서 보건복지부의 일괄 약가인하 정책을 규탄하는 '전국 제약인 생존투쟁 총 궐기대회'가 열렸다.

정부가 제약산업의 글로벌 진출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1,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000억원 규모의 '글로벌 제약산업 육성 펀드' 조성이 마무리돼 이달부터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한다. 이 펀드를 조성하는데 복지부에서 200억원, 정책금융공사 500억원, KDB산업은행 100억원, 한국증권금융 100억원, 농협중앙회 30억원 등의 자금을 출자했다. 

이렇게 조성된 펀드는 앞으로 자본력이 취약한 중소 제약사의 해외 M&A, 기술제휴, 해외 생산설비·판매망 확보 등을 지원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앞서 복지부는 지난 2월 ‘글로벌 제약산업 육성 펀드사업 관리규정’을 행정예고하고 올해 7월까지 펀드 결성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초 계획보다 조금 늦어진 셈이다.

복지부는 연내 1~2개 제약사에 대한 투자를 시작으로 앞으로 8년간 이 펀드를 운용할 계획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 제약업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과연 제약산업 육성 펀드가 적절한지 의문이다.

오히려 육성 펀드보다 구조조정 펀드를 조성하는 것이 도 필요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국내 제약업체들은 연구개발 기간과 비용이 많이드는 신약보다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의 성분을 카피한 제네릭 의약품과 높은 약가에 의존해 성장세를 이어왔다.

신약이 아닌 제네릭 중심이다보니 의약품 자체의 경쟁력보다는 영업마케팅 중심의 경영 전략을 펼쳐왔다. 이 과정에서 리베이트 제공 등의 부작용이 노출됐다.

연구개발 비용이 낮은 제네릭 의약품 중심인 탓에 제약시장의 신규 진입장벽이 낮고, 그러다보니 영세한 중소 제약사가 난립하고 있다.

영세한 중소 제약사끼리 과다 경쟁을 펼치는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리베이트 관행과 높은 판매관리비 비중 등의 병적 징후가 나타났다. 국내 제약시장은 신약 개발 중심의 '진짜' 제약기업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되지 못했다. 규모의 측면에서도 외국의 다국적 제약기업과 경쟁이 되지 않을 만큼 열악한 수준이다.

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완제의약품을 제조하는 제약사 267개소 가운데 생산액 기준으로 1,000억원 이상 기업은 40개소(15%)에 불과하다.

글로벌 신약개발이 가능한 1조원 규모의 기업은 전무하다.

"제약업계 구조조정은 시장 구조가 선진화로 가는 현상"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제약산업을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1,000억원 규모의 육성 펀드를 조성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효과를 달성할지 의문이다.

오히려 경쟁력이 없는 제약사를 구조조정하고, 신약 연구개발 역량을 갖춘 업체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게 더 필요하다.

다행스러운 점은 지난해 일괄 약가인하와 리베이트 쌍벌제 시행 등으로 제약업체들이 과도한 판관비 지출을 줄이고 영업을 통해 얻은 수익을 신약 연구개발 등에 투자하는 식으로 기업구조가 선순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경쟁력이 없는 제약사가 자연스럽게 도태되면서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식으로 시장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제약업계 안팎의 시각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제약업계의 구조조정은 시장 구조가 선진화로 가는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아직도 제약사 수준에 못 미치는 회사가 많지만 제약업계 자체적으로 변화하려는 노력이 약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올해 들어서만 국내 업체 가운데 도저히 제약기업이라 부르기 민망한 의약품 품질관리 수준을 보이는 일이 잇따랐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발생한 한국웨일즈제약의 의약품 유통기한 위변조 사건이다.

이 회사는 유통기한이 지나거나 임박해 반품된 의약품 200여품목을 유통기한을 위조한 뒤 재판매한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으며,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약산업 역사상 처음으로 전품목에 걸쳐 강제회수와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제약협회도 이 사건과 관련해 “한국웨일즈제약이 의약품의 유통기한을 위조해 판매한 혐의가 사실이라면 제약사로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로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또 동화약품은 급성설사약 제품을 제조하면서 식약처에 신고된 내용과 다른 원료를 사용한 것이 뒤늦게 드러나 판매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제약기업으로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글로벌 제약산업 육성하는 펀드보다는 불량 제약기업을 솎아내고 정리하는 구조조정 펀드를 조성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것을 반증한 셈이다.

경쟁력이 없는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고 제대로 경쟁력을 갖춘 제약사를 선택적으로 지원해야 글로벌 제약산업 육성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국내 제약시장에서 소규모 영세 업체들이 난립하면서 전체 업계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점을 무시해선 안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3월 발표한 ‘제약산업 구조 분석과 발전방향’ 보고서를 보면 제약업체의 난립 상황과 그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집중도 측정지표인 ‘허핀달-허시만지수’(HHI)를 이용해 2011년 기준으로 전체 제약시장에서 적정한 수준의 국내 제약기업의 수를 추정한 결과 약 63개로 분석됐다.

보고서는 "HHI지수 추정을 위해 분석한 301개 제약기업의 매출액 기준 시장점유율은 1위부터 63위까지의 기업이 74.0%를 차지하고 있었다"며 "즉, 매출액 기준 상위 20%의 기업이 전체 제약산업 매출의 3/4을 점유하고 있고, 제약산업 전반에 영세한 규모의 기업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일부 기준 미달의 영세한 제약사 난립과 이들의 제네릭 의약품 영업에 몰두한 기업 행태가 결국 R&D 투자 등을 가로막고 비정상적인 리베이트 등을 유인한다는 지적은 향후 제약산업의 발전을 위해 진지하게 검토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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