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 허버트 허시 지음 / 강성현 옮김 / 책세상 펴냄, 2009년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보다는 ‘기억’이라는 단어에 끌려 읽게 되었습니다만 ‘제노사이드’에 무게가 실린 책입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교수는 <제3의 침팬지>에서 확인된 집단학살의 사례들이 15세기 이래 아주 최근인 20세기 말까지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남극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일어났고, 또 일어날 가능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점을 설파한 바 있습니다.

[북소리]를 통해서 소개드린 다카노 가즈아키의 추리소설 <제노사이드>에서 이미 인용한 위키백과에서 설명한 ‘제노사이드(genocide)의 뜻을 다시 인용합니다. 제노사이드는 ‘집단학살(集團虐殺)’이라 번역되고 “그리스어로 민족, 종족, 인종을 뜻하는 ‘geno’와 살인을 뜻하는 ‘cide’를 합친 말이며,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범죄를 일컫는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집단 학살의 정확한 정의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법적인 집단 학살의 정의는 1948년 국제 연합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서 나옵니다. 이 협정 2조를 보면 집단 학살을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한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집단의 일원을 살해하거나 심각한 육체적ㆍ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고의적으로 육체적 파멸을 의도한 생활 조건을 강제하는 것, 집단 내 출생을 막는 것,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 이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저지른 대규모 학살이 재발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국제적인 공감이 만들어낸 성과이지만, 이 규정이 실효적으로 지켜지고 있는가하는 의문이 드는 사건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오늘 소개드리는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에서는 ‘왜 인간은 서로를 죽이는가? 어떻게 하면 이 살육의 비극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관하여 오랫동안 연구해온 미국 버지니아 주립대학 정치학과 허버트 허시교수의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홀로코스트를 통하여 582만 여명이 생명을 잃었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국제협약도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50년이 지나도 제노사이드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보스니아내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990년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것을 계기로 1992년 보스니아에서 문화적·종교적·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세 집단(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이슬람교도) 사이의 묵은 갈등이 표출되면서 대략 20만 명이 죽고 75만 명이 실종되었으며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저자는 홀로코스트나 보스니아 내전이 촉발된 배경에는 집단들 사이에 감추어진 묵은 증오의 기억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럽사회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유대주의 정서는 그 뿌리가 로마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특히 탄압받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 강화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예수의 죽음의 책임을 유대주의자들에게 미루려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선택이 작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스니아 내전에는 남슬라브민족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가톨릭신앙을 가지고 있는 크로아티아인과 그리스정교를 신앙으로 하는 세르비아인 그리고 보고밀파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집단들이 14세기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에서부터 입장을 달리하던 것이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오스만튀르크에 대항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창설하면서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량학살이 반복된 뿌리 깊은 원한관계가 성립되어왔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통하여 후세에 전해지는 것인데,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패자의 역사는 아무래도 살아남은 자의 기억에 의존되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가면서 잊혀지고 왜곡될 수 있고, 승자의 역사는 기록될 당시부터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정확하다고 믿고 있는 자신의 기억이 사실은 ‘소멸, 정신없음, 막힘, 오귀인(誤歸因),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과 같은 요인에 의하여 심각한 오류를 빚어내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습니다.(대니얼 샥터 지음,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

특히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이 현재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집단의 기억을 왜곡하고 통제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노사이드의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노력하는데,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기 위하여 “유대인과 집시에게 나치 독일이 행한 제노사이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신화, 꾸며진 이야기이거나 날조로 여겨진다.(63쪽)”는 주장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아시아 각국에 잔악한 범죄행위를 한 일본이 적절한 사과와 반성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옹색한 모습과 겹쳐지는 대목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보는 것처럼,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사회에서는 죽음의 빚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는 인식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기억이란 개인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특히 원한과 관련된 일이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라면 기억의 강도가 약해지거나, 다르게 기억하는 구성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 내에서 복수에 관한 기억이 면면히 이어져 내리는 것을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리처드 도킨스교수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제안한 밈(meme)이라는 문화적 요소로 설명하는 것이 쉬울 듯합니다. 개체 사이의 관계에서 발전하는 무형의 산물이라고 보는 문화도 모방되고 복제되어 전파되고 전달될 수 있다는 개념을 담은 단어입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서 “밈풀에서 펴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0년, 323쪽)”는 도킨스교수의 설명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자는 제노사이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기억’이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한다고 믿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갖는다. 그러므로 기억은 분명 정치현상이며, 가능한 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해의 측면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제노사이드의 정치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얻기 위해서도 기억, 역사, 그리고 기억의 역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32쪽)”

저자는 기억이 희미해지고 목격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역사가 재구성될 가능성을 설명하는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베텔하임과 데 프레의 시각을 비교하고 있는데, 나치 친위대가 피해자들의 협력 없이는 기능할 수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나치의 화학실험실에서 일하면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와 같은 생존자의 경험을 정신분석 이론이라는 필터를 통하여 강도가 조절되는 베텔하임의 방식을 부정적으로 평가를 하는 반면, 오랜 위기의 압박 아래서 살아가는, 정신과 몸에 난 끔찍한 상처를 견디는, 아직도 거기에서 제정신으로 여전히 인간인 채 살아 있는 능력이라고 생존을 정의하는 데 프레의 방식은 인간주의적, 문학적 시각에서 생존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노사이드에 참여한 가해자들의 의식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앞서 리처드 도킨스가 제안한 문화적 유전자 밈개념을 인용하였습니다만, 사람은 기억이나 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나 공식적으로는 교육과정을 통하여, 비공식적으로는 문화전파를 통하여 그러한 문화의 규범을 배우게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 적은 “모든 교육은, 아이에게 자신의 피를 나눈 사람들과 인종이 모든 타자들보다 우수하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가져야 한다.(179쪽)”는 구절을 인용한 저자는 히틀러의 제3제국이 권위에 대한 복종과 인종적 증오를 양대 축으로 한 체제를 구축했다고 주장합니다. ‘복종 배우기’야 말로 제노사이드를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핵심요소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무방비한 민간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에 참여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권위화, 일상화, 비인간화라고 하는 세 가지의 사회적 과정을 거쳐 승인된 학살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답한 켈먼과 해밀턴의 이론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통한 사회화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바로 ‘제노사이드의 고리를 끊어내는 길’ 역시 교육에 있다는 점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저자는 삶을 보존하기 위해 죽음에 대해 연구한다고 합니다. “죽음을 조장하는 데 있어서의 기억의 영향과 역할을 인정하는 것은 삶을 보존하는데 기억을 사용할 것을 고려하도록 이끈다. 삶을 보존하는 윤리는 죽음을 조장하는 데 있어서의 기억의 역할을 확실히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277쪽)”는 저자의 주장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려면 악순환을 일으키는 근본적 요인을 제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가정이기도 합니다. 교육을 통하여 집단의 나쁜 기억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과정이, 역시 용서와 화해를 교육하는 것으로 선순환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보건의료 분야와 관련된 내용을 조금 언급하려 합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수용소나 일본의 731부대에서 의사들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질병을 치료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어야 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의사가 거꾸로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 일이 가능했을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자아가 두 개의 기능적인 통합체로 분할되어 부분 자아가 완전한 자아로 행동하는 이중화를 통하여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의사들은 시민사회에 재통합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당수는 의료업무로 돌아와 은퇴하거나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지만, 패전후 자살하거나, 전범재판결과에 따라 복역하거나 도망친 의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터에서 군진의료와 직접 관련이 없는 포로의 심문과 관련된 의료자문에 관한 논의(맥스웰 그렉 블록 지음,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 청년의사 펴냄)나 사형집행에 의료인이 참여하고 있는 점에 관한 논의(아툴 가완디 지음,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한다, 동녘 사이언스 펴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사협회의 윤리강령에는 의사가 사형집행과정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사형수의 사망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의사의 역할이 독극물주입으로 사형방법이 바뀌면서 사형의 집행과정에 개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것 같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권력을 쥔 자의 정책적 결정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게 되는 비극적인 제노사이드는 광신적인 애국주의의 산물로서,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인류가 풀어야 할 과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노사이드라고 하는 맹목적인 집단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국제전쟁법과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함께 묶는 것, 인도주의적 개입의 도구를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제노사이드와 정치적 학살을 부추기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 메커니즘을 공식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국제적 합의를 통하여 민족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시각을 협력적 국제주의로의 전환시켰을 때 비로소 제노사이드가 종식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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