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석(환자복지센터 소장)

당신이 만약, 하루에도 30번씩 화장실을 다니며 주기적으로 혈변을 쏟는데도 치료 방법이 없어서 평생 질병을 달고 살아야 한다면, 또는 급작스럽게 죽을 것 같은 통증에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을 반복하면서 언제 통증이 또 찾아올지 모르는 공포 속에 살아야 한다면 어떤 심정이시겠습니까?

사는 게 지옥이다

한 아이의 부모로서, 병명도 모르는 질병으로 시름시름 아픈 자식을 부둥켜안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해야 한다면, 혹은 고작해야 서른을 넘기기 어렵다는 희귀병에 걸린 자식을 돌보느라 매월 수백만 원의 치료비를 쓰고 가정이 파탄 날 지경이라면, 또 어떠시겠습니까?

아마 당신은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야, 지옥이 따로 있나? 이렇게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지옥이지'라고 생각할 겁니다.

지난 2월 뮤코다당증이라는 희귀병 두 아이를 돌보던 어머니가 자살했습니다. 20년 동안 자식을 수발하다 끝내 자신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난달에는 치매에 걸린 아내를 4년간 돌보던 남편이 결국 신병을 비관해 자동차에 아내를 태우고 저수지로 차를 몰아 동반 자살했습니다. 목숨을 포기할 결심을 굳히기까지 나날이 이분들에게 세상은 지옥이었을 겁니다.

중증 질병 걸리면 빈곤의 나락으로

우리나라에서 2011년 기준으로 생존하는 암 유병자는 총 96만654명입니다. 2014년에는 암으로 치료 받는 환자와 생존자를 합하여 1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9년 기준으로 등록된 희귀 난치성 질환자는 138개 78만5011명인데, 전문가들은 100만 명까지 된다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2010년 심혈관, 뇌혈관 질환으로 입원과 외래로 치료 받은 환자는 무려 165만2649명이나 됩니다.

한국에서 중증 질병에 걸리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는 곧 가계 파탄이나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004년 대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조사에서도 위기 사유 1순위가 질병(54.1%)으로 저소득(49.1%)을 앞질렀고 2006년 3월부터 시행된 긴급 복지 지원 사례 분석 결과에서도 질병 또는 부상으로 인한 사유가 전체 상담의 69%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2005년 사회보장학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질병은 사업 실패, 가정 해체와 함께 빈곤으로 추락하는 3대 원인입니다.

2012년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도 건강, 빚, 실업 등으로 인한 위기 취약 가구는 전체의 무려 57.8%인 400만 가구로 추정되며 위기 취약 가구 중 가구 구성원의 건강 문제가 위기 원인인 경우가 가장 많은 23.7%에 달합니다. 질병이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발생시키는 핵심적이고 직접적인 사유가 되고 있습니다.

중증 질병일수록 보장이 안 되는 건강보험

이렇게 질병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험이 심각한 원인은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나라 복지는 연고 복지, 각개약진 복지라고 비유됩니다. 2010년 시민건강증진연구소에서 실시한 '중년 가장의 암 사망 후 유가족 실태' 연구를 보면, 민영 의료보험만으로는 치료비를 마련하기 불충분하여 적금이나 주식, 직장 내 지원, 심지어 주택도 의료비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국민이 가벼운 질병이나 부상으로 병원을 이용할 때에는 별로 문제점을 못 느끼실 겁니다. 그런데 중증 질환에 걸리고 입원 진료를 받는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암이나 희귀 난치성 질환처럼 중증 질병 치료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가 존재하고 과잉 진료도 너무 심합니다.

암과 같은 중증 질환일수록 수도권 대형 병원인 삼성병원, 아산병원 등 소위 빅 파이브(Big 5)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립니다. 예약하기조차 어렵고 몇 시간을 기다리다가 불과 15초, 20초 이렇게 진료 받는 실정에서 병원이나 의사가 제시하는 의료 서비스를 거부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대표적인 게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입니다. 상급종합병원에서는 갖가지 검사와 진료에 일괄적으로 선택진료비가 부과됩니다. 진료와 관련된 의사를 환자가 선택하는 게 본래 취지인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게 선택진료비입니다.

1-2인실에 적용되는 상급병실료도 참 부당합니다. 다인 병실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입원이라도 하는 게 다행인 실정이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상급병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원비 부담이 크지만 혹여라도 치료상 불이익을 받을까 봐 문제 제기조차 제대로 하기 힘듭니다.

비급여 진료비 때문에 가장 고통 받는 경우가 희귀 난치성 질환입니다. 질병명을 확진하기가 어려워 이 병원 저 병원 다닙니다. 수개월, 심지어는 2년씩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병원들은 상호 진료 정보 공유가 안 되고 이윤 동기 때문에 가는 병원마다 자기 공명 영상(MRI), 양전자 단층 촬영(PET) 같은 비싼 검사를 반복하는데, 이게 다 비급여입니다. 설령 확진을 받더라도 치료 과정에서 질병에 따른 합병증이 발생하는데, 이 합병증에는 국민건강보험 급여 적용이 안 됩니다. 또 치료약제의 경우 마땅한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아 대체 의약품을 쓰게 되는데 이 약품 또한 보험 적용이 안 됩니다.

소득 보장이 결여된 국민건강보험

환자와 가족들이 중증 질병에 치료비가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기간에 경제 활동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2001년에서 2003년까지 국립암센터에 내원한 암환자 중 암 진단 당시 직업이 있는 305명을 2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를 보면, 96%가 정상적인 직업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2011년 암 환자 가족 보호자를 대상으로 직업 상실 여부를 조사한 결과 '농업, 임업, 어업'에 종사하거나 '자영업'에 해당하는 32.4%가 암 환자를 돌보게 된 후 일을 쉬고 있었고, '사무직'이나 '비사무직'에 종사하는 임금 노동자의 50%가 실직을 경험하였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건강 불평등은 한 세대에서 발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식 세대로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원래 국민건강보험은 질병, 임신과 출산 및 사망 등으로 인해 가계의 예상치 못한 지출과 소득 상실을 보전하여 가구의 빈곤화를 방지하는 중요한 기능을 맡습니다. 상병 수당이나 피부양자 간병 수당, 출산 수당, 장제비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국민건강보험법 제45조(부가 급여)에 "공단은 이 법에 규정한 요양급여 외에 대통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장제비, 상병 수당 기타의 급여를 실시할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 제25조(부가 급여)에 ①법 제45조에 따른 부가 급여는 임신, 출산 진료비로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항만 있지 실시는 되지 않고 있습니다.

상병 수당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국민들도 많을 텐데요, 공적 의료보험의 가입자가 업무상 질병이나 부상 이외의 일반적 질병 또는 부상으로 치료를 받는 동안 상실되는 소득을 보전하기 위하여 공적 의료보험이 지급하는 현금 급여입니다.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상병 수당 제도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 최대 18개월까지 표준 보수월액의 60%를 지급하고, 대만 전민보험에서도 소득의 50%를 지급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산재보험에 가입한 (대부분) 정규직 근로자는 산재보험에서 휴업급여를 지급받을 수 있습니다만, 통상 1년 정도밖에 보장이 안 되고, 치료가 안 되어 그 이상 가면 직장을 잃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소득이 상실됩니다.

핵가족화 때문에 가족 중 한 사람이 질병 치료 중인 경우, 간병을 위해 휴직할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정규, 임시 일용직 등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는 근로자, 엄청난 숫자의 영세 자영업자는 그나마 산재보험에도 해당이 안 되기 때문에 대책이 전혀 없습니다. 

중증, 희귀 난치성, 만성 질환자의 건강 관리 비어 있다

증증 질환자의 건강 관리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보통 보건 의료 서비스 공급 체계는 의료 이용 목적에 따라 질병의 예방과 건강 증진을 담당하는 1차 예방, 질병을 치료하는 2차 예방, 치료 이후의 재활 서비스인 3차 예방으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에 관한 규칙에서 건강 관리 및 상담 행위에 대한 수가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병의원에 지불하는 국민건강보험 수가는 낮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1차 의원, 2차 병원, 3차 종합 전문 요양기관 간에 기능 정립도 안 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의료 서비스 공급 체계에는 예방과 치료, 재활 서비스가 비대칭적으로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사후적, 증상 위주의 치료에 집중하기 때문에, 중증 질환자들은 기본적인 건강 관리조차 사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암 치료 중인 환자는 항암 치료 이외에도 암종에 따른 투병 정보, 일상적인 증상에 대한 대처 외에도 면역력을 높이기 위하여 적절한 식이와 영양, 운동, 심리적 안정 등이 매우 중요하지만 이러한 건강 관리 서비스를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공공 기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근거가 불확실한 시장에서 잘못된 각종 '카더라' 정보에 현혹되어 임상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을 사용하거나 건강 보조 식품을 섭취함으로써 치료비 부담을 가중할 뿐 아니라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또한 암은 일반적으로 고령에서 발생하므로, 암 생존자는 다른 만성 질환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흡연과 비만, 부적절한 영양 및 신체 활동의 부족은 잘 알려진 암의 위험 요인이며, 암 진단 이후에도 지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원발암(처음 생긴 암)의 경과, 2차암의 발생, 동반 질환의 발생에 영향을 주므로 이에 대한 관리가 중요합니다. 또한 방사선 및 항암제에 의한 심혈관 질환이나 골다공증 등이 발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국내 연구 자료에 의하면 5년 이상 장기 생존한 암 환자들의 사인 중 4분의 1은 암이 아닌 다른 원인이었음에도, 암 이외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낮아 만성 질환 관리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심혈관, 뇌혈관 질환자의 건강 관리와 재활 서비스 문제도 심각합니다. 뇌졸중 발생 후 재발 방지를 위한 관리와 재활 서비스 제공 체계가 미흡하여 급성기, 아급성기 및 만성 퇴원 6개월 이후 42.1%의 환자들이 2차 예방 및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심·뇌혈관 질환에 의해 장애 상태에 이르고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는 환자의 규모는 매년 14만-4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심·뇌혈관 질환자 역시 발생 전후로 재활 치료를 받고 가족들을 포함하여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하지만, 시행 중인 정부의 만성 질환자 관리 사업은 절주, 금연 등 건강 행태의 교정이나 혈압 관리 등 신체적 증상 위주의 의료적 접근에 국한되고 있어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주류입니다.

희귀 난치성 질환자와 가족에게는 의료비 지원과 신속한 검진 시스템은 물론, 질환별 특성에 따른 장애의 최소화를 위한 특수 보육, 교육 및 직업 재활, 생활 보조인, 간병인, 요양 시설 등을 지원하는 포괄적인 프로그램 지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1000여 가지로 알려진 질환 중에서 138개 질환에 대해서만 의료비 일부 지원, 헬프라인을 통한 제한된 정보 제공, 극히 일부 환자에 대한 쉼터 제공 등이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환자와 가족에게 사적으로 떠넘겨지고 있고, 이것이 가계 파탄, 자살, 빈곤과 질병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원인입니다.

건강권은 사회권의 으뜸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건강은 각 개인이 모든 기회를 실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권리 중에서 건강권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할 사회권 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건 의료를 시장에 맡길 수 없고 공공적으로 관리하고 보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급속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였고, 질병 및 의료 구조가 중증, 희귀 난치성, 만성 질환으로 전환된 상황에서 지금의 의료 보장 제도와 의료 서비스 공급 체계로는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가계 파탄과 자살로 내몰리고 있는 중증 질환자와 가족들이 처하고 있는 지옥과 다름없는 목불인견의 현실을 하루빨리 개선해야 합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의료 보장 제도를 개혁할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절망감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 최고의 파워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의료 공급자와 의료 자본의 강고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의료 보장 제도 개혁의 과제들이 번번이 좌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4대 중증 질환만은 국가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마저도 후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최근 정부가 발표한 공약 가계부에 따르면 4대 중증 질환 지원을 위해 책정된 예산이 고작 연 5000억 원 수준입니다.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제시했던 1.5조 원의 3분의 1에 그칩니다. 제대로 4대 중증 질환을 국가가 책임지려면 3조 원 이상 소용된다는 시민사회의 추계에는 더 턱없이 부족한 금액입니다. 증증 질환을 앓는 환자, 가족들의 시름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대대적인 의료보장 개혁 운동 필요

우선 시급하고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병원 이외 재가에서 일상적으로 건강을 관리할 수 있고 사회 경제적인 문제를 지지해줄 수 있는 공익적인 전문 기관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에서는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이후 서울시민복지기준추진위원회를 만들어서 재가 중증 질환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환자복지희망센터를 2014년부터 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언제까지나 공공 의료 제도의 개혁이나 민간 중심의 상업화된 의료 시장에 기댈 수 없다는 각성에 따라 '건강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자주적 해결 대안을 추진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들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 대만처럼 광범위한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의료 보장 제도 개혁 운동이 필요합니다. 지금 환자들이 간절히 바라는 세상은 그 어떤 질병에 걸리더라도 마음 놓고 치료받을 수 있는 세상, 마음이 먼저 치유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이 아니라면 아무리 선진국이고 문명국이라고 자화자찬한들 그게 다 허구 아니겠습니까?


* 이 글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홈페이지(http://mywelfare.or.kr/)에 게재된 것입니다. 본지는 내만복으로부터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전문을 재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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