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뷰] 보수언론·의협, 코로나19 방역대책 실패 규정하며 '비선 전문가그룹' 지목
전문성·사명감으로 뛰어든 전문가에 대한 모욕적 비난

[라포르시안] "지난 한달간 정부 방역 실패의 단초를 제공한 인사들이 여전히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의료계를 대표하며 정부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전문가 자문그룹 역시 실패를 인정해야 하고, 이들에 대한 전격적인 교체가 필요하다" <대한의사협회 2월 24일 '코로나19 사태 심각 단계에 따른 긴급 기자회견' 중에서>

"대한의사협회의 대정부 입장 가운데 비선 전문가 자문그룹에 대한 교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역을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한다고 합니다. 중국발 입국 제한의 불필요성을 말한다거나 무증상 전파 가능성이 없다고 자문했다고 합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지난 정부에서 최순실의 존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2월 25일자 페이스북 게시글 중에서>

코로나19 유행이 지난달 중순 이후 대구와 경북 지역의 집단감염 사태를 계기로 확산되면서 의료계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정부가 '중국인 입국금지'를 실행하지 않아 초기방역에 실패했다는 비난이 거세다. 일부 전문가그룹의 잘못된 조언이 국가방역대책 수립에 영향을 미쳤다는 책임론도 불거지고 있다.

이런 주장과 함께 '방역 비선', '비선 전문가그룹'이라는 황당한 용어도 등장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관련 기사: 안철수 코로나 방역 관련 “文, 비선 있다면 심각, 최순실 아니냐”>

지난 3일자로 중앙일보가 보도한 "의료 사회주의 김용익 사단, 이중 코로나 실세는 靑이진석"이라는 기사가 이런 논란에 불을 지폈다. <관련 기사: "의료 사회주의 김용익 사단, 이중 코로나 실세는 靑이진석">

이미지 출처: 3월 3일자 중앙일보 기사
이미지 출처: 3월 3일자 중앙일보 기사

해당 기사는 중앙일보 한 논설위원이 대한의사협회 최대집 회장을 인터뷰 형식으로 만나 정부의 코로나19 방역대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였던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을 언급하며 '문재인 정부 코로나 방역 비선'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기사에서 '방역 비선'으로 직간접적으로 지목한 이들은 이진석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 등이다.

중앙일보는 익명의 의료계 소식통과 의료인의 말을 인용해 "서울대 교수 출신인 김용익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정점으로 한 '의료 사회주의자'들이 대통령 주변에 포진해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거나 "이진석 실장이 비선 라인을 주도한 핵심 실세"라며 "이 실장은 고려대 의대 동문인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 등의 자문을 많이 듣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나 '방역 비선'이라는 표현은 근거도 불명확하거니와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다.

우선 이진석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은 고려대 의대 출신으로, 서울대의대 교수를 지낸 인물이다. 국정상황실장은 국정원·검찰·경찰 등에서 올라온 각종 정보를 취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사건·사고에 대한 정부 대응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진석 실장은 국가 감염병 재난 상황에서 여러 부처와 전문가그룹 등의 정보를 취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감염병 방역대책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대통령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다. 

청와대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맡고 있는 이 실장을 두고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 보고용 국정 문건을 전달받고 정부부처 인사에 개입한 최순실과 비교하며 '비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이 실장은 대한의사협회에서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조정실장을 지냈던 이력도 있으며, 보건의료정책 분야에서 전문가로 꼽힌다. 감염병 방역 대응에 있어서는 임상현장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의료자원 활용과 의료체계 개편 등이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실장이 코로나19 방역 대응에서 국정상황실장으로서 대통령의 중요한 정책결정과정에 조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업무영역인 셈이다.

지난 2월 2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방역전문가들 간 간담회 모습. 이날 간담회에는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 이종구 前 질병관리본부장,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 엄중식 가천대길병원 감염내과 교수, 최보율 한양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김홍빈 분당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 등이 참석했다. 사진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지난 2월 2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방역전문가들 간 간담회 모습. 이날 간담회에는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 이종구 前 질병관리본부장,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 엄중식 가천대길병원 감염내과 교수, 최보율 한양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김홍빈 분당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 등이 참석했다. 사진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이명박근혜 정부 등 감염병 재난 때마다 사명감으로 나선 전문가들

국가방역대책 수립과 실행에 적극적으로 조언하고 참여했던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교수와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를 '비선 전문가그룹'으로 비유한 건 그간의 활동이나 이력으로 볼 때 당사자들에겐 모욕적인 표현이다.   

이재갑 교수는 감염내과 전문의로, 국내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부터 각종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서 감염 예방과 방역 대응 방향을 제시하며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 교수는 공식적으로 코로나19 방역대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중앙사고수습본부의 '자문 특별보좌단'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중수본의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의협이 지난 1월 말 구성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비상대책본부'의 부본부장도 맡았다.

이 교수는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 때도 방역 일선에서 활동했고,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의협 신종감염병 TF팀장 자격으로 '메르스 민관 종합대응 TF'와 즉각대응팀에서 활동한 신종감염병 방역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이기도 하다. 

또다른 비선(?)으로 지목된 엄중식 교수도 감염성 질환 분야의 명의로 꼽히는 인물이다. 엄 교수는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메르스 대책 민관합동 TF 즉각대응팀 간사로 활동했다. 메르스 유행의 조기 종식을 위한 전략 수립, 국가방역대책 수립 등으로 감염 확산 방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에 ‘메르스 대응 유공 정부포상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 보건당국에서 엄 교수에게 방역 대응에 관한 여러 가지 자문을 구했고, 중앙사고수습본부의 '자문 특별보좌단'에도 참여하며 신종감염병 방역 현장에서 누구보다 경험이 많은 전문가로서 적극적인 자문활동을 했다.

이들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서, 감염병 분야 전문가로서 공식적인 업무절차에 따라 공개적으로 업무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선(秘線, 몰래 어떤 인물이나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음. 또는 그런 관계)'이라는 부적절한 단어를 끌어와 억지스러운 비난을 제기하는 건 저열한 마타도어일 뿐이다.

게다가 중앙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의료계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문 대통령이 코드가 맞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을 듣고 편향된 정책 결정을 하는 바람에 국민 피해를 키워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재갑 교수나 엄중식 교수는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이명박 정부) 때나 2015년 메르스 사태(박근혜 정부) 때도 정부의 방역 대응에 적극 참여하고, 국가방역대책 수립 과정에 조언을 했던 전문가들이다.

감염병 바이러스가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듯이 감염병 전문가이자 의료전문가인 이들에게 방역 대응에 있어서 정치적 고려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선 방역'이라는 표현은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뛰어들어 헌신한 전문가에 대한 모욕이나 다를 바 없다.

극우단체 활동 전력과 편향된 정치색으로 의료계 내부에서조차 우려를 사고 있는 최대집 의협회장과 출처도 불분명한 '익명의 의료계 소식통'을 앞세우고, 이들을 입을 빌려 '의료사회주의'라느니 '진보 진영 출신', '비선 방역' 같은 단어를 연결하고 꿰맞추려는 텍스트의 행렬이 음험한 뒷골목을 떠오르게 한다.

이런 식으로 비난하면 앞으로 앞으로 어떤 전문가가 사명감을 갖고 감염병 대응에 나서겠느냐고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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