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협, 수련병원 실태 파악 나서..."타인 아이디 사용한 대리처방 종용"

[라포르시안] 전공의법 시행 이후 주당 근무시간 규정을 준수한다는 취지로 수련병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전자의무기록(EMR) 셧다운제'가 실제론 전공의를 불법으로 내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수련병원이 전공의에게 근무시간 이후에 타인의 아이디를 사용해 처방을 낼 것을 종용하는 사례도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대한전공의협의회(회장 박지현)는 최근 1,076명의 전공의 회원을 대상으로 ‘EMR 셧다운제’ 실태 파악을 실시한 결과 상급종합병원, 기타 수련병원 등 수십 곳에서 비정상적인 EMR 접속이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조사 결과를 보면 전공의의 EMR 아이디가 근무시간 외에는 접속이 차단돼 불가피하게 당직 근무중인 타인의 아이디를 이용해 처방기록을 입력해야 하는 사례가 드러났다. 일선 전공의가 정규시간에 끝내지 못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법 위반을 감수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번 조사에서 EMR 셧다운제가 업무량을 줄이거나 퇴근 시간 보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85%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EMR 셧다운제가 수련환경 개선은커녕 전공의가 불법을 하게끔 조장한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인이 직접 진찰하지 않고 진단서 등 증명서를 발행하거나 진료기록부를 허위로 작성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의 A 전공의는 “업무량이 많아 도저히 정규 근무시간 내에 해결할 수 없다. 환자를 직접 확인하고 처방하지 않으면 처방해 줄 사람이 없고, 그렇다고 교수가 환자를 보지도 않는다”며 “일을 다음 사람에게 던지고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음 당직 전공의의 아이디를 빌려 처방을 내놓고 간다"고 토로했다.

지방 수련병원의 B 전공의는 “병원 수련담당 부서 및 의국에서 대놓고 당직자 아이디 사용을 종용하고 있다"며 "전공의법 때문에 근무시간 외 처방을 냈다가 걸리면 오히려 전공의가 사유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전했다.

앞서 대전협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상급종합병원 42곳 중 EMR 셧다운제를 시행 중이거나 올해 시행 예정인 곳은 34곳(80%)에 달했다.

올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은 "국립중앙의료원의 EMR 접속기록 확인결과, 일한 계정으로 병원 곳곳에서 동시다발적 처방이 이뤄졌다"고 지적하며 EMR 셧다운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박지현 대전협 회장은 “EMR 접속을 차단한다 해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의 양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EMR 접속을 차단함으로써 수련병원이 서류상으로 전공의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근거를 생산해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경민 수련이사는 “전공의법으로 전공의 근무시간이 제한돼 인력이 충원돼야 하는 시기에 오히려 수련병원은 보여주기식으로 80시간을 넘지 않도록 EMR 기록만 막기 급급했다"며 "법이 제정됐다 한들 어떻게 수련환경이 개선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EMR 셧다운제가 전공의 근무시간 문제를 왜곡함으로써 수련환경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높다. 실질적으로 전공의 근무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EMR 기록에서만 초과근무 흔적을 지우기 때문이다.

여한솔 대전협 부회장은 “근무시간 외 EMR 접속을 차단함으로써 전공의의 실제 근무 기록을 왜곡하고 대리처방을 유도해 수련병원이 전공의가 의료법을 위반하도록 적극적으로 종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박지현 회장은 “서류상으로는 마치 전공의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근무시간이 지나도 타인의 아이디를 통해 처방하며 일해야 하는 게 전공의들의 불편한 현실”이라며 “대전협은 이 문제를 절대 간과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EMR 셧다운제 폐지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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