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서리풀 논평] 무엇을 위한 ‘첨단’ 과학기술인가?

[라포르시안]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국면 전환을 이야기하니, 이번에도 필시 경제와 혁신성장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리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여러 차례 말했으니 이에 관해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신성장동력’이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판박이 논리, 과학기술 또는 지식기반 담론이 더 거세지지나 않을지 걱정스럽다.

원격의료와 혁신 신약은 삶과 세상의 ‘진보’다. 자율주행 자동차나 유전자 기술, 인공지능도 마찬가지, 고통을 줄이고 편익을 늘리며 더 안전하고 편리한 이동을 보장한다.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하는 만큼 확실한 진보가 또 있을까.

그러나 신중할 것. 모든 과학 발전을 사회적 진보라 하기는 이르다. 어떤 과학과 기술도 진공상태에 있지 않으니, 특정한 때 고유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에서 쓰인다.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도 더 고통스럽게도 할 수 있다. 목적과 수단이 뒤집히면 가장 나쁘다.

예를 들어 이미 악명(?) 높은 원격의료. 분명 더 편리하게 좋은 의료를 이용하고 환자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기술이다. 인구가 적고 노인이 많은 농어촌 지역을 생각해보라. 상담이나 교육을 하는데, 또는 환자 상태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시장과 수익, 산업 논리가 과학기술의 가치를 압도하여 종국에는 지배한다는 점이다. 주민과 건강보다는 기술 적용과 수익을 먼저 따지는 원격의료의 산업, 이를 둘러싼 정치경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정부는 말썽을 피해 우선 의료취약지 등에 시범사업을 하겠다고 하지만(관련 기사 바로 가기), 돈벌이와 산업이라는 동기를 숨긴다는 의심을 풀기 어렵다.

왜 본심을 몰라주느냐고? 몇몇 개인 의견과 특정한 정책 목표가 아니라 ‘구조’를 볼 수밖에 없어서다. 지금 여러 정권과 정부를 관통하며, 나아가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이 원격의료를 밀어붙이는 것은 구조이며 또한 정치경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회적 이해와 상식, 담론은 정책이라기보다 우리 시대의 ‘틀’이다.

“기업인을 `슈퍼애국자`로 예우하면서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살려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유경제, 인터넷은행과 핀테크, 원격의료, 자율주행차,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혁명 등 4차 산업혁명의 도도한 흐름을 주도하는 `플랫폼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이러한 지식권력 안에서 원격의료는 하나의 플랫폼의 한 요소일 뿐이다. 건강, 보건, 의료 이용,...또는 사람들의 복지와 편익, 삶의 질은 그저 영혼 없는 형식적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 거론되는 대부분 과학기술이 비슷하다. 목적과 수단의 역전! 대중교통도 없는 농촌에 혼자 사는 노인의 건강관리, 또는 장애가 있는 이들의 좀 더 편리한 운전, 이에 활용되는 과학기술의 진보성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 말썽(?) 많은 바이오 신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데 이바지하는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명분일 뿐이다. 수십 년 동안 막대한 ‘혈세’를 쓴 결과가 기껏 주식시장 교란인가?

“2006년 설립한 신라젠은 우두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재조합하는 방식의 항암 바이러스인 펙사벡을 개발했다. 회사 측은 이 바이러스가 암세포만 공격한다고 주장했다....미국 FDA가 2015년 임상 3상을 허가했고 이런 기술력을 인정받아, 2016년에 적자 기업이었음에도 코스닥에 기술 특례 상장했다....시총은 10조원을 돌파하면서 코스닥 시총 2위까지 올랐다. 신라젠은 한 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다. 작년에도 매출 77억원에 영업손실이 590억원이었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국가’ 과학기술 투자가 오로지 산업화, 상용화, 실용화에 목을 매고 있으니 민간도 이에 맞출 수밖에. 건강 효과보다는 시장성. 연구의 실력과 성과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이런 모델을 따르고 이 체제에 순응해야 한다. 바이오 자본주의(biocapitalism) 또는 ‘파모크라시(pharmocracy)’ (관련 책 소개 바로 가기).

거센 유행인 4차 산업혁명, 빅데이터, 인공지능 모두가 더 나을 것이 없다. 사람들을 위해, 이들의 삶과 생활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부차적이다. 신제품, 혁신, 시장점유율, 투자, 수익, 주식, 코스닥, 벤처 등의 말이 끊이지 않는다. 모조리 상업화, 시장화, 경제화를 앞세우니 어떤 것은 주식시장에서 또 어떤 것은 안전에서 비슷한 사달이 나리라 예측한다.

기초 연구가 어떻다든지 국가 연구개발 전략이 이래야 하느니 하는 이야기는 일단 접어둔다. 우리는 지금 ‘유행’하는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데도 본래 가치 또는 사람 중심의 시각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원격의료, 빅데이터, 인공지능, 유전자 기술이 ‘인간의 얼굴’을 할 때 해당 기술도 더 발전하리라는 확신이다.

시장이 (진정한) 과학기술 발전을 왜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보건의료의 경우, ‘시장형’ 과학기술의 성패, 나아가 생존 여부는 건강보험에 진입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급여가 되고 수가를 받을 수 있으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학술지 논문 정도로 끝이다. 당연히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온다.

“의료AI 적용이 어려운 것은 수가 등 비용 문제와 강력한 개인정보보호법, 의료법 등 규제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의료영상 기반 AI 판독지원 솔루션이 의료기기로 허가를 받았다. 병원은 도입을 주저한다. 도입에 따른 수가가 마련되지 않아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환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고 어떻게 고통과 부담을 줄일 수 있는지는 건강보험에 진입할 때 동원하는 명분에 그친다. 가치는 뒤집힌다. ‘사람’을 놓칠 때 과학기술의 첨단과 새로움은 무슨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상품과 이익만 좇는 과학기술은 과연 어디에서 길을 찾을까?

우리는 지금 주목을 받는 과학기술(디지털 의료, 빅데이터, 인공지능, 유전자 기술 등)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점에서 인간과 역사의 진보라고 생각한다. 마땅히 발전해야 하고 잘 쓰여야 하며 인류의 복지 향상에 이바지해야 한다. 분명 그럴 수 있다.

이렇게 되려면 탈시장화와 공공성 회복이 시급하다. 원격의료 기술을 어디다 적용하여 어떻게 키울까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시장 논리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해 관련 산업을 육성할까 고민하는 것도 비슷하다. 공공성에 기초한 과학기술은 출발과 방향이 이와 다르다.

의사와 병원이 모자라는 지역에서 어떻게 적절한 의료와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지, 어떤 방법으로 제2의 메르스에 대비할 수 있는지, 세계 최고수준인 자살과 결핵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지, 그에 필요한 신약과 의료기술이 무엇인지,...먼저 사람 중심의 목표가 명확해야 과학기술 개발과 발전의 제 방향이 잡힌다.

무작정 상품과 시장을 어떻게 만들고 산업을 육성할까 고민하기보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공적 목표를 먼저 정하고 이에 필요한 과학기술에 투자하라. 예를 들어, 취약지 주민의 보건의료 접근성을 보장하는 전체 계획이 먼저, 이에 필요한 원격의료 기술 개발과 적용이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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