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뷰] 한국의료 관통하는 '저비용 착취구조'로 번아웃 내몰리는 의료인들
'일과 환자안전의 균형' 추구하는 쪽으로 의료체계 전환해야

[라포르시안] 의료계에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은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다. 많은 의료인들이 '월화수목금금금'을 업무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24시간 365일 내내 쉼없이 돌아가야 하는 병원 시스템 속에서 워라밸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의사들의 장시간 노동시간은 관행처럼 굳어졌다.

앞서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2016년 11월 21일부터 2017년 1월 8일까지 의사회원 8,564명 중 환자를 진료하는 7,885명을 상대로 실시한 '2016 전국의사조사' 결과를 보면 진료의사의 주당 근무시간은 평균 50.0시간이고, 연간 근무시간은 평균 2,415.7시간에 달했다. 평균 근무일수는 300.8일로 조사됐다.

한국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과 비교해도 의사의 노동시간은 압도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7 고용동향'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한국의 취업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069시간으로 OECD 평균(1,764시간)보다 305시간 더 길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긴 편에 속한다.

한국의 임상의사는 노동자 평균 노동시간보다 연간 346시간(약 14.4일) 더 일하는 셈이다. OECD 회원국 평균과 비교하면 연간 노동시간이 651시간(약 27일) 더 길다.

일주일 내내 병원 문을 열고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도 많다. 의료정책연구소 조사 결과를 보면 진료의사 중 주 5일 근무를 하는 비율은 16.1%에 불과했다. 조사에 참여한 의사 중 68.5%가 주 6일 근무를 한다고 응답했다. 심지어 일주일 중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주 7일 근무한다는 응답도 15.4%나 됐다.

외과든 내과든 노동시간이 길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 기획홍보위원회가 최근 흉부외과 전문의 9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근무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흉부외과 전문의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12.6시간에 달했다. 13시간 이상 근무한다고 답한 비율도 66%에 달했고, 심지어 15시간 이상 근무한다는 응답도 18%나 됐다.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76.1시간이었다. 주당 평균 81시간 이상 근무한다는 응답 비율도 36%였다. 주당 근무시간이 100시간이 넘는다는 응답자도 9명이었다. 조사 대상 중 20명(21%)은 일주일에 7일 모두 근무한다고 답했다.

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 오태윤 이사장은 “흉부외과 전문의 자체도 적은 상황인데 전공의법 시행 이후 전공의까지 빠져나가니 정말 힘들다”며 “전공의법을 제정한 이유가 환자안전 때문인데, 환자안전에서 전공의보다 더 중요한 전문의들이 번아웃 될 지경에 처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소화기내과 의사들도 장시간 근무로 인해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번아웃(소진, Burnout) 증후군'에 빠질 위험에 노출돼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나영, 장은선 교수팀은 2018년 4월부터 10월까지 국내 44개 기관에서 내시경 검사 및 진료를 하는 222명의 소화기내과 의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일과 삶의 불균형 정도 등을 분석한 연구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많은 소화기내과 의사들이 진료, 시술, 연구 등 여러 가지 업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스트레스나 근골격계 질환, 소화기계 질환 등 다양한 건강 문제와 직면하고 있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2차 및 3차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국내 소화기내과 의사들의 평균 업무시간은 주당 71.5시간으로 조사됐다. 가사 및 육아 등 가정과 관련된 일을 위해 주당 16.6시간을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건강 상태에 대한 조사에서는 대상자 중 89.6%가 근골격계 통증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소화기계 증상은 53.6%, 우울과 불안과 같은 정신적 증상은 68.9%가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참여한 소화기내과 의사 222명 중 143명(64.4%)한테서 번아웃 증상이 관찰됐다. 성별로는 여성이 70.4%로 남성(59.7%)에 비해 번아읏 증상 비율이 더 높았다. 특히 30~40대 여성 소화기내과의사의 경우 감정소진과 성취도에 있어서 최악의 상태를 보여줬다.

그러다 보니 소화기내과 의사들의 직업만족도는 떨어졌고, 여성의 경우 다시 직업을 선택한다면 의사가 되겠다고 답한 비율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낮았다.

이 연구를 주도한 분당서울대병원 김나영 교수는 “의사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문제는 환자들의 건강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만큼, 의사들의 근무 형태를 개선하고 여의사의 지속적인 활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쉼 없는 장시간 노동'은 환자안전도 위협 

전문의뿐만 아니라 전공의나 간호사 역시 장시간 노동에 내몰려 있다.

얼마 전까지 전공의들은 주당 평균 100시간 이상 근무를 하고, 일주일에 4회 당직근무를 서는 것이 일반적인 근무 형태였다. 다행히 수련병원의 열악한 전공의 근무한경이 환자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문제인식이 불거지면서 지난 2015년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전공의특별법'이 제정됐다.

전공의특별법에 따르면 전공의 수련시간은 주당 최대 80시간으로 제한되지만 교육적으로 필요하면 8시간을 추가할 수 있도록 했다. 수련환경을 개선한다고 하는게 주당 최대 근무시간을 88시간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당초 국회에 제출된 전공의특별법은 전공의 주당 근무시간을 최대 80시간으로 규정하고, 연속근무도 20시간(응급상황 36시간)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했지만 병원들의 우려와 반발로 일정 부분 근무시간 규제를 완화했다.

문제는 주당 88시간 근무 상한조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지난해 9월 2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온라인으로 시행한 ‘2018 전국 전공의 병원평가’ 결과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전공의 25.2%가 '수련병원에서 전공의법이 잘 또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전공의 3명 중 1명은 최대 연속 수련시간인 36시간을 초과한 경험이 있었으며, 전공의 3명 중 2명은 오프(off)일 때도 근무를 지속해야 했다고 응답했다.

3교대 근무에 시달리는 간호사 직종 역시 만성적인 인력부족 상태에서 연장근로가 일상화 돼 있다.

전국보건의료노조가 실시한 2018년 보건의료노동자 정기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간호사 등 보건의료노동자의 50.5%가 ‘업무량이 근무시간 내에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다’고 답했다. 야간근무 전담과 기타의 일 평균 연장근무 시간이 각각 97.52분과 95.11분으로 일상적인 장기간 노동에 내몰려 있다.

이처럼 의료인력의 만성적인 부족 상태에서 하는 '쉼 없는 장시간 노동'은 업무집중도와 업무연속성을 떨어뜨려 의료 질 악화와 환자안전을 위협하는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지금 의료인에게는 워라밸보다 '일과 환자안전의 균형'(Work and Patient safety balance)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이 더 절실하다.

우리나라는 현재 다른 국가보다 적은 의료인력으로 훨씬 더 많은 병상을 유지하면서 국민들의 높은 의료이용을 유지하고 있다.

'OECD 보건통계 2019'에 따르면 보건의료이용 부문에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횟수가 연간 16.6회로 가장 많고, 평균 재원일수도 18.5일로 가장 긴 편에 속했다. 반면 임상의사는 인구 1,000명당 2.3명, 간호 인력은 인구 1,000명당 6.9명으로 인적 자원이 OECD 국가 중에서 부족한 것으로 분류됐다. OECD 평균은 인구 1,000명당 임상의사는 3.4명, 간호 인력은 9.0명이다.

더 적은 인력으로, 더 낮은 의료수가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방식으로 병원과 의료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비용 고효율'의 의료시스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저비용 노동착취' 구조인 셈이다.

저비용에 기반한 노동착취로 돌아가는 의료인력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가 환자한테도 좋을 리 없다. 장시간 노동으로 번아웃 상태까지 내몰린 의사와 간호사, 저수가로 인한 박리다매식 진료패턴으로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가 2~3분 만에 처방받고 나가는 환자. 이런 걸 '양질의 의료서비스'라고 부를 수는 없다. <관련 기사: 잇따르는 대형 의료사고, 한국 의료시스템 실패 알리는 적신호인가?>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의료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계속 방치하면서 한국의료 체계에 적신호가 켜진지 오래됐다. 이제는 의료인의 삶의 질과 환자안전을 모두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근본적인 의료체계 개편을 추구해야 할 때"라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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