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명 알려주지 않고 치료한 병원 논란...의료윤리 어긋나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라포르시안] 아래 2개 문항은 2011년도 일본 의사국가시험에 출제된 기출문제다.

■ 환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으로 타당한 것은 무엇인가?

a. 입원 중에 무단으로 외박하는 것
b. 시시때때로 병의 상태에 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
c. 진료기록 무단복사
d. 채혈에 실패한 의사에게 화내고 소리지르는 것
e. 진료의 순번을 무시하고 진료실로 들어오는 것

■ 52세 남성 여객기 조종사. 대장검진 대변잠혈검사 양성으로 나타남. 정밀검사 목적으로 내원했다. 대장내시경 결과 S상결장 사방의 진행성 종양으로 나타났고, stage IV의 S상결장암이었다. 진료방침으로 S상 결장 절제수술과 항암화학요법을 권할 예정이다. 모친, 처, 의대생 딸까지 4인 가족이다. 제일 처음으로 병의 상태를 알릴 적절한 상대는?

a. 환자본인
b. 처
c. 모친
d. 딸
e. 직장상사

정답은  'b'와 'a'이다. 환자의 알권리와 자기결정권에 관한 의료윤리 문제이다.

만일 환자가 더는 치료가 힘든 중증질환이라고 판단한 의사가 그 사실을 당사자나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치료방법을 선택해 실시한다면 법적으로나 의료윤리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환자의 진단명을 알려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항암치료를 실시한 병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암이지만 네가 알 필요는 없어, 이게 병원입니까?'라는 제목의 청원글에 따르면 2018년 3월 68세 환자가 감기 기침이 오래 지속되자 서울의 한 2차병원을 찾아 흉부외과 전문의에게서 흉부 CT검사를 통해 소세포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를 입원시켜 놓고 폐암 치료를 위한 정밀 검사나 항암치료는 하지 않고,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대증치료를 실시했다.

치료에 차도가 없다고 생각한 환자는 3차병원으로 전원하려고 했으나 의사와 간호사는 치료가 잘 되고 있고, 담당의사가 '명의'라며 만류했다. 해당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는 입원치료를 받은 열흘 동안 폐암이라는 진단명을 환자와 보호자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의사는 폐암을 진단했으나 이미 치료가 소용이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환자가 심리적으로 실망하고 불안해 할까봐 폐암이라는 사실을 환자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환자는 폐암이라는 진단명을 모른 체 3차병원으로 전원했고, 그 병원에서 검사를 통해 ‘소세포 폐암 3기B’ 진단을 받았다. 3차병원에서는 신속하게 표준항암치료와 신약으로 집중치료를 시작했고, 경과가 좋아서 1년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환자는 생존해 있다.

환자 가족은 진단을 하고 병명을 알려주지 않은 병원을 상대로 환자의 알권리 및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했다며 의료소송을 진행했으나 패소 판정을 받았다.

이와 관련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1일 성명을 내고 "모든 환자는 언제든지 질병의 예방이나 치료를 위한 최선의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 환자는 자신의 치료 과정 전반에서 자기결정권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현행 의료법 제4조 제3항은 의료기관의 장은 보건의료기본법 관련 규정에 따른 환자의 권리 등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사항을 환자가 쉽게 볼 수 있도록 의료기관 내에 게시해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보건의료기본법 제12조(보건의료서비스에 관한 자기결정권)는 모든 국민은 보건의료인으로부터 자신의 질병에 대한 치료 방법, 의학적 연구 대상 여부, 장기이식 여부 등에 관해 충분한 설명을 들은 후 이에 관한 동의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했다.

환자단체연합은 "의사는 폐암을 진단한 후 치료가 소용이 없을 정도로 악화돼 환자가 심리적으로 실망하고 불안해 할까봐 폐암이라는 사실을 환자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해명했으나 '알권리 및 자기결정권'의 내용에는 '질병상태'가 있고 여기에는 당연히 진단명도 포함된다"고 강조했다.

환자단체연합은 "68세 환자가 수술로는 완치가 어려워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로 생명을 연장해야 하는 ‘소세포 폐암 3기B’ 진단을 받았다면 이 환자와 환자보호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단명을 포함한 질병상태를 의료진에게서 정확하게 설명 듣고 앞으로의 치료방법을 결정하는 것"이라며 "환작 심리적으로 큰 충격으로 작용해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했다면 보호자에게라도 신속히 진단명을 알려주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2차병원에서 ‘소세포 폐암 3기B’ 진단을 받았다면 종양내과가 있는 3차병원으로 전원 조치한 후 정밀검사를 통해 환자가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안내하지 않은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환자단체연합은 "환자의 알권리 및 자기결정권은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정확하게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환자가 치료결정 과정 참여할 때 긍정적인 효과 나타내 

한편 기존 연구에서 환자가 치료결정 과정에 참여했을 때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치료법 관련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았을 때 환자와 가족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서울대병원 신동욱 전 가정의학과 교수(현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와 충북대의대 예방의학과 박종혁 교수 연구팀이 국내 암환자 및 가족 725쌍과 이들을 진료하는 암전문의 134명을 대상으로 암환자의 치료결정에 가족이 참여해야 하는지를 묻는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국제학술지인 정신종양학(psycho-oncology)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다수의 암환자(94.8%)와 가족(97.4%), 암전문(98.5%)는 참여해야 한다고 답했다.

암환자와 가족 90% 이상은 가족의 참여가 치료결정, 의사소통, 심리적지지를 돕는다고 응답했다. 암전문의도 치료결정(76.1%), 의사소통(82.8%), 심리적지지(91.8%) 등 긍정적 효과에 대체로 동의했다.

진행성 암환자가 신약 임상시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려면 정확한 정보 제공과 참여를 보장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관련 기사: 절박한 처지 암환자, 신약 임상 참여를 결정할 때 필요한 건?>

기존 항암제가 듣지 않는 진행성 암환자는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에 독성을 각오하고서라도 검증이 되지 않은 신약이라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거나 의사나 가족이 권유하니 원치않아도 참여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있다.

그러나 전국 13개 암센터의 암환자와 보호자 725쌍과 이들을 치료하는 134명의 암전문의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를 보면 신약 임상시험 참여의 위험과 이득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경우 환자와 보호자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