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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의 전사' 간호사는 캡을 쓰지도, 원피스를 입지도 않는다의료현장 간호사 현실 몰이해 드러내는 어설프고 조악한 상상 여전해
1995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

[라포르시안] 최근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간호사의 복장을 둘러싼 논쟁 글이 이어지고 있다.

논쟁의 발단은 한 트위트 사용자가 그린 원피스 근무복 차림에 캡을 쓴 간호사 캐릭터 그림 때문이다. 이 그림이 타임라인에 등장하자 간호사를 성적 대상화 했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국내 병원에서 간호사 캡이 사라진 건 1990년대 중반 쯤이다. 당시 서울대병원 등 일부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간호사 업무 전문성과 활동성을 높이기 위해 캡을 없애고 원피스 형태의 근무복도 실용성을 높인 형태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전통적인 간호사 복장을 상징하는 '흰색 원피스(白衣)' 대신에 다양한 컬러와 함게 투피스나 바지 디자인의 근무복을 착용하는 병원이 늘기 시작했다.

간호사 캡도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으며, 특히 착용했을 때 여러 가지 불편함이 크다는 이유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많은 간호사가 캡을 착용했을 때 통풍이 되지 않아 착용 부위의 탈모 증상이나 두통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주사를 놓기 위해 고개를 숙일 경우 일부 캡이 떨어질까 봐 불안감을 느낀다는 환자들도 있었다.

간호학과 3학년 학생들이 병원에서 임상실습을 앞두고 '나이팅게일 선서'를 할 때도 캡을 쓰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근무할 때 착용하는 바지 형태의 실습복을 입는다.

병원 현장에서 이런 형태의 간호사 근무복이 정착된 지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대중매체에서는 캡을 쓰거나 짧은 치마를 착용한 왜곡된 간호사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의료현장의 현실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어설프고 조악한 상상이다.  

무엇보다 현재 병원 현장에서는 과거의 ‘백의(白衣)의 천사’라는 간호사 이미지가 통용될 수도 없다. 오히려 현장의 간호사들은 스스로를 '백일의 전사(戰士)'라고 자조한다.

외과중환자실 간호사로 20년 넘게 근무한 경력의 김현아 씨는 작년에 펴낸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라는 책을 통해 이렇게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간호사는 ‘백의(白衣)의 천사(天使)’라고 불리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백 가지 일을 해야 하는 ‘백(百)일의 전사(戰士)’가 되어야 했다"

대부분의 병원에서 간호사들은 만성적인 인력부족 상태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자를 돌보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응급환자를 옮겨줄 사람이 없어 직접 그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치고도 대체 인력이 없어 다친 허리를 복대로 감아가며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 식사 시간조차 제대로 챙길 수 없는 탓에 너무 허기져 중환자실 문 뒤에서 몰래 삶은 계란을 먹는 간호사. 응급실에서 술에 취한 환자로부터 폭언·폭행이나 성희롱을 당해도 하소연 할 데 없는 간호사.

근무시간이 끝나도 돌보던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를 닦고 급작스러운 심폐소생술이 끝난 뒤 환자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정신없던 순간에도 분실된 응급 비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 간호사. 병원이 인력보다 시설 투자 경쟁에 열을 올리는 사이 청소 용역비용을 충당하는 미화원 역할까지 떠맡아야 하는 간호사.

병원이 적정 간호인력을 확충할 수 없게끔 하는 건강보험제도와 의료정책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다.

2015년 6월 메르스 사태 당시 을지대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들의 모습. 

"6월 17일다음날 아침, 우리는 더 이상의 아픔이 없길 바라며 또 바삐 뛰었다. 무거운 방호복과 마스크로 숨이 가쁘고 머리가 아프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게 쉬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쉬는 시간이면 창밖의 움직이는 것들을 확인하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다시금 현재로 돌아왔다. 서로의 지친 안색을 보며 웃어주고 격려했다. 내 앞의 동료 몸이 내 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과를 마치고 우리가 생활하는 병동에서 기분전환 겸 눈썹을 그린 oo쌤을 보며 마스크 쓴게 더 예쁘다는 농담을 던지고 기분 좋게 각자의 병실로 돌아갔다. 밖은 아직도 난리통인 모양이지만 정작 우리는 그 안에서 침착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오늘 하루도 살아 있음과 함께하는 우리 중환자실 식구들에게 ‘감사’하며 마무리 한다."  <당시 을지대병원 중환자실에 근무하던 간호사가 공개한 일기 중에서>

의료현장의 현실은 이렇다.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도 환자의 생명을 돌보는 일이기에 천사가 아니라 전사처럼 강해질 수밖에 없다.

간호사가 '백일의 전사'로 불리는 건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인해 이직률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신규 간호사들은 병원 업무에 제대로 적응할 시간적 여유나 교육도 없이 빨리빨리 적응할 것을 요구받고, 심지어 '태움(집단 괴롭힘)'을 당한다.

이런 업무환경에선 100일을 버티기도 힘들다. 수많은 간호사들이 병원을 떠난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신규 간호사의 평균 이직률은 33.9%이고, 간호사 평균 근속연수는 5.4년에 불과했다.

요즘은 하루 이틀 만에 퇴사를 통보하고 도망치듯 병원을 떠나는 '응급사직'을 하는 간호사도 생겨나고 있다. 병원의 업무환경이 더 참기 힘들 만큼 심각한 상태로 악화됐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만성적인 인력부족으로 혼자서 환자 돌봄부터 온갖 일을 해내다가 번아웃(burnout) 상태에 빠지고, 병원을 떠날 때 쯤이면 감정과 자긍심을 모두 소진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간호사의 일은 아름다웠지만 슬픈 자괴감으로 가득한 직업이었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중에서>

의료현장의 간호사는 캡을 쓰지 않는다. 원피스 근무복도 입지 않는다. 환자를 돌보는 데 최적화한 실용적인 근무복을 입는다. 부족한 간호인력으로 '노동력을 갈아넣는', 일터가 아니라 전쟁터 같은 병원 현장에서 그들에겐 전투복이다. 

김상기 기자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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