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야마센 홀로 지키다

[라포르시안]  일제 말기에 천황 통치 체제를 부정하는 행위를 단속하는 법률로 1925년 5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치안유지법'. 일본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법으로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은 일제 시대 조선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철저하게 악용됐다.

당시 이 법의 개악을 마지막까지 반대했던 유일한 일본의 정치인이자 생물학자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됐다.

최근 발간된 '야마센 홀로 지키다'(건강미디어협동조합, 원제: 민중과 함께 한 야마모토 센지)는 야마모토 센지(山本宣治, 1889∼1929)라는 일본의 생물학자이자 정치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야마센'이란 애칭으로 불린 그는 만 39세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삶의 궤적은 사회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꽃을 심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싶어' 택한 원예 견습, 캐나다에 건너가 접한 민주주의의 숨결, 귀국 후 생물학자로서 교토대학과 도시샤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여성해방을 위한 피임법 계몽 운동, 정치인으로서 '치안유지법' 개정 반대 운동까지.

1920년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한 야마센은 교토 대학 대학원(의학부)에서 양서류인 영원(蝾螈)의 정자 발달 연구를 하는 한편 도시새 대학의 예과 강사로 '자연과학 개론'을 가르쳤다. 그는 도시샤 대학에서 하는 강의에 '인생 생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인간이 '신의 아들'이라든지 천사라든지 하는 환상에서 눈을 뜨게 하는 것"이며 "저속한 성 지식이나 비과학적 생리학을 타파하고 과학적인 태도로 양성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가 값싼 노동력과 전쟁에 필요한 병사를 확보하기 위해 국민에게 '낳자, 늘리자'라는 슬로건으로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에 본격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산아제한연구회’를 조직해 입회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상담에 응하고, 성교육과 구체적인 피임 방법, 생활 방식에 대해 교육하는 동시에 노동자 교육 활동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정부 시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야마센의 활동은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됐다.

이즈음 일본 정부는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이용해 사회주의자와 전투적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데 몰두했고, 1925년 5월부터 악명높은 '치안유지법' 시행에 들어갔다.

치안유지법은 '국체(천황제)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 부정을 목적으로 한 결사와 행동을 처벌'하는 데 목적을 둔 법률로, 공산당을 비롯한 노동자, 가난한 농민들의 정치활동을 탄압하는 데 악용된다.

그 무렵 교토를 중심으로 한 농민 운동을 통해 농민과 노동자의 지지에 힘입어 야마센은 1928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직후 그는 자신을 지지한 선거 운동원들에게 "이제부터 나는 민중이 움켜쥔 한 자루의 창입니다. 나 개인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결의에 찬 말을 전했다.

자신의 말처럼 같은 해 제국의회에 치안유지법 위반자에 대해 사형까지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이 상정되자 야마센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선 한 자루의 창이 된다.

야마센은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치안유지법 개정 반대에 동참했던 동료들이 하나둘 돌아설 때에도 홀로 끝까지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고 전국을 돌며 법개정에 반대하는 활동을 폈다.

1929년 3월 5일 개정안에 대한 국회 발언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날 밤 극우 단체가 보낸 자객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며 만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인자 장발장은행장인 홍세화 씨는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그는 과학자로서도 인간은 위하는 존재로서 목적이지 이용하는 도구로서 수단이 아니라는 정언명령을 흔들림 없이 수행했다"며 "그는 인간 앞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국가주의를 비롯해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고 수단으로 삼아 총알받이로 만들기도 하는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저항했던 고결한 인간 정신의 소유자였다"고 평했다.

■ 야마센 홀로 지키다

우지 야마센회, 황자혜 엮음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 192쪽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