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서리풀 논평] ‘낙태죄’를 폐지하라

[라포르시안] 헌법재판소가 곧 ‘낙태죄’에 대한 선고를 한다고 한다. 시간이 다가오면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점 더 높아진다. 지난 주말에도 서울 한복판에 1천 5백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낙태죄를 없애야 하는 보건학적 이유를 다시 길게——제시할 필요는 없으리라. 반대론자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명과 삶의 품위를 위해서도 낙태를 범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보건학과 의학과 과학의 근거가 차고 넘친다는 것만 강조한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낙태’와 ‘낙태죄’는 완전히 다르다는 평범한 상식이다. 낙태는 왜 범죄가 되는가? 낙태죄의 그 ‘죄’는 국가와 국가 기구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국가가 개인과 그 삶, 그리고 사회와 그 존재 방식에 직접 개입하는 힘이자 방식이 바로 죄를 따져 처벌하는 것이다. 국가는 낙태죄를 통해 낙태에 개입한다.

그 유명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면, 국가가 낙태에 개입하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거나 자연 현상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개인과 공동체에 개입하는 국가는 어떤 특정한 국가이고 (인격체는 아니나) 자기 이익에 충실하다.

먼저 관점 조정. 첫 문단에서 “‘낙태죄’에 대한 선고를 내린다”고 적을 뻔했다. ‘내린다’는 시각 효과가 큰 말 가운데 하나로, 내리는 것은 당연히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판결을 내리고 심판을 내리고 선고를 내린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법원과 헌법재판소와 정부와 국가가 국민과 주민과 시민과 피치자에게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적을 뻔한 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헌법재판소를 포함한 국가 기구가 왜 낙태에 개입하는가? 성범죄에 개입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우리는 낙태에 대한 국가 개입이 ‘인구’와 ‘젠더’를 핵심 대상으로 삼는다고 판단한다. 여기서 젠더는 펑퍼짐한 말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여성에 개입한다.

국가가 인구에 개입하는 것은 여기에 사활적 이해관계가 달렸기 때문이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의 말대로 모든 국가는 “국력을 강고히 하고 증강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아무리 엉터리 국가와 통치자도 자기 이익에 충실한 점에는 예외가 없다. 지금 한국에 퍼져있는 저 많은 ‘저출산’ 담론의 국가적 이해관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가 개입하는 것으로 치면, 본래 개인 사이의 결합인 결혼(궁극적으로는 사랑)을 ‘규율’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국가가 왜 결혼을 허용하거나 금지하는가? 겉으로는 가족과 결혼제도를 통해 개인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국가와 개인이 만나는 지점일 뿐, 국가의 원대한(?) 이해관계는 개인이 아니라 인구 전체다.

바로 그 국가가 여성을 억압해왔다는 것이 ‘낙태죄’를 빚어낸 주범이다. 어떤 국가가? 압도적으로 남성화한 국가가. 무엇을 위해? 당장 인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체계가 핵심 이해관계다. 인구를 규율하고 관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어떤 사회 질서를 ‘재생산’하려는 것. 어떤 방법으로? 여성과 여성의 몸에 개입하고 억압함으로써.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주장과 논거를 살펴보라. 도덕과 윤리, 사회 질서, 전통, 가족 등을 동원하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왜 낙태를 단죄하려 하는지 그 동기가 바로 드러난다. 특히 국가권력과 통치의 관점.

“사회는 핸들이 고장난 자동차처럼 침범해서는 안 되는 생명윤리의 중앙선을 마구 넘나들 것”

“이기적 생각과 육체적 쾌락 때문에 생명이 짓밟혀서는 안 된다”

“우리 생명을 자의적으로 없애는 것은 죄”

“위헌 판결을 하게 된다면 현재 저출산과 인구절벽의 위기에 봉착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운명 짓는 의미심장한 판결이 될 것”

도대체 무엇을 겁내고 왜 걱정하는가? 윤리, 도덕, 생명, 죄를 기준으로 하면 낙태를 문제로 삼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주범’과 ‘공범’과 ‘방조범’을 찾아내고 ‘처벌’해야 한다. 비난하고 비판하고 요구할 대상이 틀렸다.

낙태죄 폐지를 걱정하는(또는 겁내는) 데는 두 가지 왜곡된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고 심각하다. 국가의 권력과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우월한 국가와 남성이 열등한 여성을 보호하고 가르치며 통제해야 한다는 것.”

낙태죄 폐지 반대에도 작동하는 이 세계관은 강력하고 집요하다. 여성을 ‘생명윤리’ 같은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육체적 쾌락’을 탐하며, 무엇이 죄인지도 잘 모르는 존재로 보지 않으면, 어떻게 저런 비판을 할 수 있을까? 이른바 ‘부권주의’ 또는 ‘보호자주의’라 부르는 태도들은 이 세계관의 한 부분이다.  

핵심 문제는 사람에 대한 이 모든 이해 방식은 당연히 ‘억압’을 낳는다는 것이다. 오늘 누구에나 미치는 이 많은 고통과 생명 훼손을 낳는 원인. 아,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그 억압은 개인을 넘어 구조적이어서 젠더를 가리지 않는다. 고통은 여성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 미친다.  

다시, 낙태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저 유명한 어느 선각자의 분석이 아니라도, 국가는 확대된 가족이자 가부장적 통치가 작동하는 곳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런 국가 기구의 핵심에 있고, 그만큼 오래되고 완고한 구조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번 결정도, 가장 낙관해도 ‘점진’ 정도일 것이다.

국가와 국가 기구가 여러 힘이 각축하는 시간이자 공간이라는 점에 희망을 건다. 영국의 정치사회학자 제섭(Bob Jessop)이 말하는 국가의 실체는 지금 희망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국가란,

“제도와 조직으로 이루어진 구분 가능한 통합적 실체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국가의 기능은 공통의 이해관계나 일반 의지라는 이름으로 사회 구성원에 대한 구속력 있는 집합적 결정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것이다.”

다른 학자의 좀 더 쉬운 말을 따오면, 국가는 여러 권력이 경쟁하며, 제도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형식과 내용이 사전에 확정되지 않은, 여러 제도의 앙상블이다. 여러 힘의 크기와 관계가 바뀌면 그 앙상블은 과거와 다르다.

앙상블로서의 국가를 바꾸려면 힘의 크기와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이 때 힘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며, 국가와 젠더도 그 주체이자 대상이며 관계다. 지금은 기존 관계가 흔들리는 시기. 각 주체의 실천은 곧 권력관계를 바꾸려는 시도이며, 이 작은 <논평>조차 그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의 주장은 이렇다. 과학과 정책으로 판단하면, 낙태죄는 틀렸다.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윤리와 도덕으로도, 낙태죄가 오히려 비도덕적이다. 억압과 고통보다 더 중요한 윤리 기준은 있을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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