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독감 유행으로 740만명 감염
일제 수탈정책과 독감 유행으로 이중삼중고
"조선총독부, 독감 방역 실패를 한국인 탓"

3.1운동 당시 사진. 이미지 출처: 국가기록원
3.1운동 당시 사진. 이미지 출처: 국가기록원

[라포르시안] 올해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3.1운동의 역사적인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적극 이뤄지고 있다.

의료계에서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일제강점기 때 의료인의 독립운동 활동과 역할을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1918년 3월부터 1919년 초반까지 전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이 3.1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성이 있다는 분석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학술적으로도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일제감점기 한국의 3.1운동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연구가 적지 않다.

의학의 역사 분야를 다루는 전문가 단체인 대한의사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醫史學>에 '1918년 한국 내 인플루엔자 유행의 양상과 연구 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통권 제31호, 2007년 12월)라는 제목의 논문이 수록됐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양일석 전 교수와 천명선 교수가 작성한 이 논문은 1916년부터 1920년까지 4년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재직하며 한국내 독립운동 조력자로 활동한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바탕으로 1918년 당시 한국의 인플루엔자 피해상황과 연구 현황을 분석했다.

'1918년 한국 내 인플루엔자 유행의 양상과 연구 현황' 논문에 따르면 스코필드 박사는 자신의 논문 서두에서 1918년 9월부터 한국에서 인플루엔자가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인구의 25~50%가 이환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정보를 받은 바가 없어 현재 정확한 환자와 사망자의 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구의 1/4에서 1/2이 감염되었을 것이다. 교사와 학생들에서 높은 발생률을 보여 대부분의 학교는 문을 닫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양일석 전 교수 등은 논문에서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 내 인플루엔자가 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당시 인플루엔자 유행의 근원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는 듯하다"고 해석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918년 11월 국가 주도 아해 대량으로 인플루엔자 백신이 제조됐으며 도쿄에만 33곳의 접종소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내 종두법 접종소가 있기는 했지만 이곳을 통해 유행성 감기 백신을 공급했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논문은 "전세계를 휩쓸었던 1918년 인플루엔자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월의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전후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했을 뿐 아니라 국민들은 일본의 본격적인 수탈정책으로 인해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며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위생 시스템이 적용되면서 콜레라와 결핵 같은 전염병에 대한 방역이 시행되었으나 인플루엔자 유행에 대해서는 자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속수무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보다 직접적으로 스페인 독감과 3.1운동의 연관성을 분석한 논문도 있다.

2017년 12월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이 발간한 <인문논총>(제74권 제1호)에는 인제대학교 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김택중 교수가 작성한 '1918년 독감과 조선총독부 방역정책'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김택중 교수는 이 논문에서 조선총독부의 독감 방역 실패로 일상적인 죽음을 목격하게 된 한국인들이 일제의 무단정치 10년의 절망감을 분노로 표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고 분석했다. <관련 기사: 1927년 영흥·해남의 ‘에메틴 중독사건’…일제의 잔인한 식민의학>

김 교수는 당시 조선총독부와 경무총감부 자료, 매일신보 관련 기사,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 등을 근거로 한 선행연구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독감이 크게 유행했던 1918년 9월부터 1919년 1월까지 한국에서 독감으로 인한 인명피해 규모를 추정했다. 

논문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1919년 1월 30일자 기사에서 '경무총감부에서 조사한 환자와 사망자의 수효'를 인용해 독감으로 인해 한국인은 742만2,113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13만9,128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경무총감부 기관지였던 <경무휘보(警務彙報)>는 1920년 3월호에 실린 한 논설을 통해 조선에서 755만6,693명의 독감 환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14만527명의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독감 유행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속출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적절한 방역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오히려 독감 유행에 따른 피해를 한국인 탓으로 돌렸다.

매일신보는 1918년 11월 3일자 '朝鮮人에 死亡者가 만은 이유는 치료를 잘 못하는 까닭이다'라는 기사에서 경무총감부 위생과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독감으로 특히 한국인이 많이 죽는 이유가 무모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한국인들의 치료방법에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1918년의 식민지조선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인한 물가 등귀와 쌀값 폭등, 이어진 기근에 의한 민생 도탄과 그 결과인 전국 단위의 소요와 파업, 그리고 이에 더해 신종독감 창궐로 인한 수많은 사망자까지 발생함으로써 한계 상황을 넘어선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며 "헌병경찰을 앞세운 기존의 무단적 대처로 1918년 독감 방역에 실패한 경무총감부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제 도처에서 죽음의 일상화를 목격하게 된 식민지조선의 한국인들은 절망감을 넘어 분노까지 느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무단정치기의 막바지였던 1918년 9월부터 1919년 1월까지 5개월 동안 식민지조선에서만 전 인구의 거의 절반 가까이 이환되어 이 가운데 14만여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는 1918년 독감 범유행이 이후 한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아직 충분히 연구되고 검토되지 못한 상태"라며 "그러나 1918년 독감은 식민지조선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경무총감부 및 헌병경찰의 해체까지 초래한 1919년 3⋅1 운동의 한 도화선이 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한국역사연구회, 한겨레신문이 오는 2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하는 '3·1운동 100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학술회의에서도 1918년 독감 유행과 3.1운동의 연관성을 짚어보는 연구결과가 소개될 예정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한양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백선례 씨는 '1918년 독감의 유행과 혼란에 빠진 조선 사회'라는 발제문을 통해 당시 독감 유행으로 14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통독부는 독감 유행을 조선인의 열악한 위생 상태 탓으로 돌리는 태도를 보이면서 분노를 촉발시켰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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