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연구소 서리풀 논평] 더 이상 ‘영웅’이 필요 없는 사회로

[라포르시안] 중앙응급의료센터 윤한덕 센터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는 말을 더 보태지 않는다. 이 논평이 그가 어떻게 일해 왔는지, 어떤 조건에서 무슨 책임을 졌는지, 추가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거의 모든 언론이 경쟁하다시피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또 한 명의 의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린다. 인천 한 병원의 전공의가 오랜 시간 계속 근무하다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법을 어긴 것은 아니라고 하나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날 오전 7시 일을 시작해 사망 당일 오전 7시까지 밤새 당직을 한 뒤 오후 6시까지 더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우리는 지금 이들이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 정확한 의학적 인과관계를 알지 못한다. 직접사인, 중간 선행사인, 선행사인 같은 어려운 말이 가득한 사망진단서에 ‘과로’나 ‘스트레스’ 같은 말이 끼어들 여지는 없을 것이다. 여러 이유를 짐작할 뿐, 인과관계라 성립한다고 할 만한 원인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이 지나치게 오래 그리고 힘들게 일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갈 정도로 일이 많았다거나 35시간 연속 일했다는 언론 보도는 (그동안의 사건과 증언으로 볼 때) 과장이 아니리라.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그러니 늘 긴장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는 업무의 속사정이 이렇다니, 그동안 잘 모른 사람은 황당할 것이다. 부인할 수 없이 우리 현실이 이렇다.

따지면 아예 모르던 일도 아니다. 특히 수련을 받는 전공의가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는 ‘상식’이 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당 80시간 이하만 일하도록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전공의법)을 만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윤 센터장이 과로에 시달린 배경이 된 응급실, 응급의료, 응급의료체계도 생소하다 할 수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해 국정감사에도 한국 응급의료의 현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아마도 이제는 유명을 달리한 그가 작성했을 자료의 핵심은 한 해 1천 명이 넘는 심근경색 환자가 ‘응급실 뺑뺑이’를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이런 죽음들을 둘러싸고 온갖 말이 떠돌지만, 우리가 ‘수행’하는 말과 의례는 진정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 21>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례의 목적은 죽은 자를 제외한 사회적 관계의 체계를 재확립하는 데 있기 때문"이며,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은 특별히 그 죽은 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부재 때문에 불안정해진 공동체를 재확립하기 위해서"라고. 죽음에 대한 모든 말과 의례는 결국 삶에 대한 것이라는 뜻.  

이 ‘사건’이 “불안정한 공동체를 재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면, 차라리 그들의 죽음이 덜 아까울 것이다. 죽음을 대하는 말과 의례가 삶에 대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의 애도는 “사회적 관계의 체계를 재확립”하는 데 보탬이 되는 방식이어야 뜻이 살아난다. 

그러니, 피할 수 없이 ‘우리’와 ‘삶’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을 용서하시라. 그들에게 속한 가치 있는 생각과 실천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나, 그들의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 오용, 남용, 악용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아마도 그들의 뜻은 아닐) ‘영웅 만들기’다.

영웅 만들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당연히 죽음이 속한 구조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들을 두고는 누구나 한국 응급의료의 문제, 전공의 수련 환경, 병원 노동과 인력을 생각하게 된다. 생각의 홈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구조를 바꿀 것인지에 생각과 힘을 모으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에는 죽음과 애도가 또한 개인적이라는 점이 작용한다. 한 사람의 죽음에만, 따라서 그 사람의 삶에만 초점을 맞출 때 죽음은 구조에서 이탈하여 개인화한다. 얼마나 열심히 살고 일했는지 어떤 마음과 각오로 헌신했는지 개인에 대한 서사가 늘어날수록, “무엇을 위해” 또는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구조와 환경, 조건은 부차적인 것으로 바뀐다.

우리는 이제 그들에 대한 애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신성인, 헌신, 노고, 버팀목, 야전침대, 병원에서 숙식, 35시간 연속 근무 같은 말들이 미래를 향한 것으로 옮겨가야 한다. 이렇게 고치자, 이런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그 미래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의 차원이어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새기겠다, 잊지 않겠다, 노력하겠다 등의 결심과 각오는 체계와 제도, 시스템, 인력, 시설과 장비, 예산과 같은 ‘구조 개혁’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남겨진 숙제’라는 애도 방식은 때로 이 구조 개혁의 과제를 일깨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피할 수 없는 고민은 구조와 개혁 둘 다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 구조와 개혁조차 개인화하기에 십상인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 개인 또한 구조의 산물이라면, 이국종이 윤한덕을 추모하면서 쓴 글에서도 구조와 개인을 함께 만날 수 있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천신만고 끝에 확보된 예산과 각 지역 병원들의 지원으로 펼쳐나갔던 권역외상센터 사업이 길목마다 걸리고 좌초되는 현장을 직접 목도하자 그는 수차례 해당 외상센터의 장들과 소속 병원장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다. 무의미한 말들만 오가다 파장된 회의. 당시 일그러진 표정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윤한덕의 입가에서 차가운 말이 새어 나왔다. “2018년 이후에 이 사업이 잘도 계속 가겠구나….”

구조와 개인이 이럴진대, (적어도 지금의) 개혁은 일회적, 파국적이기 어렵다. 구조가 개인을 만들고, 개인이 다시 구조를 바꾸며, 그렇게 변용된 구조가 다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연쇄 사슬. 개혁은 개인과 구조를 모두 포함한 어렵고 지루하며 비효율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구조가 대상이고 목표라고 했지만, 애도하는 우리 개인들의 다짐과 결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난다. 지치지 않고, 더 지혜롭게, 구조를 개혁하는 데 도움이 되자는 것. 구조를 바꾸어 더는 잘못된 구조의 희생자가 없도록, 옹호하고 촉구하며 압박하자는 것. 구조 안에서 구조 밖을 지향하는 것 빼고는 개인의 의무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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