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내뱉어선 안 될 말도 있지만, 꼭 필요한 말도 있다. 진심을 담은 '미안하다'는 말이 그렇다. 지난 29일 열린 환자샤우팅카페에 참석한 내내 그 짧은 사과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가슴 한쪽에 돌덩이를 쌓아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침으로 마음이 먹먹했다. 재윤이 엄마는 작년 11월에 다섯 살 아들을 잃었다.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서 골수검사를 받던 중 진정제 과다 투여가 의심되는 의료사고로 재윤이가 숨졌다. 그러나 병원이나 의사로부터 재윤이가 사망한 이유를 듣지 못했다. 재윤이는 백혈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치료가 잘 돼 몇 개월 뒤면 항암치료를 마칠 예정이었다. 엄마와 재윤이는 손꼽아 그날만을 기다렸다. 항암치료를 마치면 재윤이가 가고 싶다는 태권도장에도 다니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작년 11월 29일 새벽, 재윤이가 발열 증상을 보여 다니던 대학병원에 방문했더니 입원을 하고 골수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엄마는 열이 나는 상태에서 재윤이가 힘든 골수검사까지 받아야 하는 게 너무 걱정됐다. 그렇지만 의료진이 재촉하듯 권유하는 바람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멀쩡하게 걸어서 병원에 입원했던 재윤이는 골수검사를 받고 몇 시간 만에 허망하게 숨졌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대구과학수사연구소는 부검소견을 통해 재윤이의 사인과 연관 지을만한 특이한 소견은 없고 골수검사를 위해 투여한 진정제와 관련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해당 병원의 의무기록에는 재윤이에게 투여한 진정제 관련 내용도 조작돼 있었다. "재윤이가 멀쩡히 걸어서 들어왔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고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로부터 듣게 된 말은 엄마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억울하면 법대로 하세요". 재윤이 엄마는 병원을 상대로 민ㆍ형사 소송을 진행 중이다

병원이란 공간에서는 생과 사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질병을 치유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치료 과정에서 환자의 생명이 위협받을 때도 있다. 각종 감염예방에 가장 철저한 곳이 병원이지만 또한 의료관련감염에 가장 취약한 장소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환자안전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 있는 부실한 의료시스템은 그 자체로 환자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병원체다. '환자안전'이란 개념이 의료기관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재윤이의 경우처럼 의료인이 환자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생명이나 신체·정신에 대한 손상 또는 부작용이 발생했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사고를 '환자안전사고'라고 부른다.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의료사고 논란은 대부분 중대한 환자안전사고의 한 사례들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환자안전사고가 의료기관에서 발생하고 있을까.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미국 의학한림원(IOM)은 1999년 발간한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보다 안전한 의료시스템의 구축(To Err is Human: Building a Safer Health System)'이란 보고서를 통해 미국에서 연간 4만 4000명에서 9만 8000명의 환자가 의료 오류(medical error)로 사망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국내에는 환자안전사고에 대한 신뢰할만한 통계가 부족하다. 지금까지 환자안전사고 보고시스템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다만 외국의 관련 연구에서 도출된 입원 환자의 의료사고 발생 가능성과 사망사고 발생 가능성, 그리고 예방가능성 등을 적용하면 연간 4만여 명이 의료오류로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 중에서 1만7,000여명은 예방가능한 의료오류로 사망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환자들이 알지 못한 채 얼마나 많은 환자안전사고가 있었던 것일까. 피해를 본 환자나 가족이 의료진한테서 듣지 못한 '최선을 다했지만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라는 그 말들은 다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삼켜버린 위로와 애도의 말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병원은 환자의 병을 낫게 하는 게 최우선이다. 그런 병원에서 의료인이나 의료시스템의 오류로 인한 환자안전사고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뿐더러 환자나 그 가족이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대부분 배척당한다. 어지간한 환자안전사고는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러던 중 환자안전사고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010년 5월 29일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던 당시 아홉 살 종현이가 항암제 투약 오류로 사망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한국환자단체연합회가 의료기관에 포괄적인 환자 안전체계 구축을 의무화 하도록 하는 '환자안전법' 제정 운동에 나섰다. 종현이가 숨지고 4년 7개월 만인 2014년 12월 29일 환자안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환자안전법 제정은 의료기관에서 환자안전사고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끔 했고, 의료시스템의 개선을 통해 이를 줄여야 한다는 의료계 안팎의 각성을 촉구했다. 환자안전법의 제정 취지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환자안전 보고·학습시스템'이다. 그 명칭처럼 이 시스템은 병원 내에서 발생한 환자안전사고에 대해서 의료인은 물론 환자, 보호자 등의 자율보고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전체 의료기관이 공유함으로써 동일한 환자안전사고를 예방토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의료인이 이를 새로운 규제로 여길 뿐 더 나은 환자안전 시스템 구축이란 목적의식은 약하다.

최근 수년간 환자안전사고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이름을 딴 법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종현이법(환자안전법)', '예강이법(의료분쟁조정 자동개시를 위한 개정 의료분쟁조정중재법, 일명 '신해철법')'. '또 다른 예강이법(진료기록부 조작 방지를 위한 개정 의료법). 이제는 또 '재윤이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언제까지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만들어진 법에 기댈 것인가.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법이 우리의 모든 일상에 개입할 수는 없다. 환자안전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과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의료인의 대응은 법보다 의료윤리에 더 충실해야 한다. 법은 최선의 진료를 하고 의료윤리에 충실한 의료인을 보호하는 쪽으로 개입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의료사고로 아들을 잃은 엄마에게 사과와 애도가 아닌 "법대로 하세요"라고 대응하니 의료윤리가 작동해야 할 곳에 점점 더 많은 법과 규제가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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