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보건의료학회·일차의료연구회,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발간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여건 조성해야"

[라포르시안] “00이 아픈데 어느 병원으로 가야하죠?”, “00질환은 어느 병원이 잘 보죠?"

인터넷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문이다. 어디어디가 아플 때는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 지 묻는. 초중고 보건교과서에는 의료기관 이용 방법으로 신체의 어느 부위가 아플 때는 어느 진료과를 이용애햐 하는지 소개한다. 전적으로 환자가 의료이용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한 집 건너 병원'이란 표현처럼 의료기관은 공급포화 상태에 의료서비스 접근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보니 이런 의료이용에 환자들도 큰 불편이 없다.

국내 의료공급체계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다. 전문의 중심의 동네의원 의사 인력구조와 각 전문과목별로 단절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건강 문제를 종합적으로 믿고 맡길만한 의사를 두지 못하고 아플 때마다 환자 스스로 판단해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는 방식으로 의료이용을 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환자에게 내맡겨진 의료이용 선택은 여러 부작용을 초래한다.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을 때 자가진단을 하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의료쇼핑을 하거나, 질병의 진단이 늦어져 합병증이 생기거나 병을 키우기도 한다.

위염으로 동네의원 이곳저곳을 방문해 치료를 받다가 잘 낫지 않자 종합병원에서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고 췌장암 진단을 받은 환자의 사례는 이런 의료전달체계 속에서 필연적인 현상이다.

지금과 같은 의료이용 방식은 의료전달체계와 일차의료가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내 의료시스템에서는 일차의료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의료공급자와 정부, 의료소비자들이 생각하는 일차의료 개념도 제각각이다.

국제사회에서 일차의료라는 개념이 구체화 된 건 1978년 9월 알마티에서 세계보건기구(WHO) 후원으로 열린 '국제의료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일차보건의료(primary health care)의 개념을 정립한 ‘알마타 선언’이 채택됐다.

알마타 선언에서 규정한 일차보건의료는 단순히 일차진료를 넘어 국가보건체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며 개인·가족 및 지역사회를 위한 건강증진, 예방, 치료 및 재활 등의 서비스가 통합된 'Health For All'이란 개념이다.

일차의료의 속성으로 ▲최초 접촉 ▲관계의 지속성 ▲서비스의 포괄성 ▲조정 기능 등 4가지를 꼽는다. 환자가 몸이 아파 의학적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첫 관문 역할을 하고, 환자의 건강문제 대부분을 진료할 수 있는 포괄성을 지녀야 한다.또 복잡하고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담당하고 연결하는 조정성과 언제나 환자를 계속 보살펴 주는 지속성을 지녀야 한다.

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일차의료 활성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 보건복지부 차원에서 일차의료 활성화를 명분으로 추진하고 있는 '의원급 만성질환관리제'와 '지역사회 일차의료 시범사업' 등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의원급 만성질환관리제는 일부 고혈압 및 당뇨병 환자의 진찰료 본인부담금 할인제도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일차의료와 주치의제도를 상세하게 설명한 가이드북이 나왔다. 최근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와 연구 단체인 일차의료연구회가 펴낸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라는 제목의 안내서이다.

'시민과 의사들의 궁금증에 답하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안내서는 일차보건의료학회와 일차의료연구회 소속 의료전문가들이 10여년 가까이 지역사회 일차의료 기반의 주치의제도 도입을 고민하면서 논의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내용은 ▲주치의제도의 의미 ▲국민들이 주치의제도에 대해 가지는 오해와 불안 ▲의사들이 주치의제도에 대해 가지는 오해와 불안 ▲주치의제도에 대한 일반적이 오해와 불안 ▲주치의제도가 잘 실시되고 있는 나라의 사례 ▲한국에서 주치의제도의 단계적 실행 방안 등의 구성으로 짜였다.

우선 일반국민의 입장에서 주치의제도가 시행되면 병원이나 의료선택에 제한을 받게 되는 건 아닌가부터 기존 단과전문의에 비해 의료서비스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또는 주치의제도가 시행되면 의료수가나 건강보험료 등이 많이 오르는 것은 아닌지 하는 궁금증과 오해를 해소할 수 있도록 설명해 놓았다.

저자로 참여한 한림대의대 사회의학교실 최용준 교수는 "주치의제도가 정착되면 환자의 의료이용에 변화가 생긴다. 그중 하나는 주치의에 의한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이라며 "또 다른 하나는 입원이나 응급의료, 그밖의 전문의료가 필요할 때 주치의가 환자의 현명한 의료이용을 안내한다. 결국 환자가 알아서 적절한 의료기관이나 의료인을 찾아야 하는 현재의 상황이 바뀌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주치의제도가 도입되면 더는 "00질환은 어느 병원을 찾아가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인터넷에 올리거나 주위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진다. 주치의로부터 건강관리에 필요한 상담을 받고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을 때 주치의가 적절한 의료이용을 안내하는 게이트키퍼(Gatekeeper)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주치의는 오랫동안 환자를 진료해 왔으므로 병력이나 건강상태, 심지어 가정형편까지 잘 알고 있게 된다"며 "주치의 본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언제, 누구에게, 어떤 진료를 받는 것이 필요한지 설명하고 적절한 의료기관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고 설명했다. 

의사들이 주치의제도에 대해 갖는 현실적인 오해와 불안도 다뤘다.

주치의제도를 하면 진료수가가 통제돼 수입이 감소하는 것은 아닌지, 일차의료 중심의 주치의가 정착되면 현재 개원하고 있는 단과전문의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젊은 의사들은 개원이 더 힘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보건당국의 통제가 더 심해지는 건 아닌지 등에 대해서 주치의제를 시행 중인 다른 나라의 사례와 국내 의료현실을 고려한 현실적인 주치의제도 도입 방안을 제시했다.

사진 왼쪽부터 고병수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 회장, 최용준 한림대의대 사회의학교실 교수.
사진 왼쪽부터 고병수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 회장, 최용준 한림대의대 사회의학교실 교수.

저자로 참여한 한국일차보건의학회 고병수 회장은 주치의제도를 도입하려면 기존 단과전문의와 일차의료 전문의 간 역할 분화 및 인력 조절이 필요하기 때문에 긴 시간을 들여서 점진적으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고병수 회장은 "주치의제도를 하려면 일차의료 전문의 수는 점차 늘려나가면서 동네의원에 진입하는 단과전문의 수는 반대로 점차 줄여 나가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단과전문의들은 전문 의료기관이나 종합병원 등에서 자신이 배운 전문 의료지식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위해 전문의별 수가 현실화나 전문병원에서 그들이 근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 회장은 "주치의가 될 일차의료 전문의가 정착하고 그 수가 충분할 때까지는 15~20년이 걸릴 것"이라며 "그리고 단과 전문의들이 전문적인 진료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자리잡기까지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절대 서둘러서 추진할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주치의제도가 환자와 의사, 의료기관 모두에게 유익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다른 저자인 대한가정의학회 정명관 정책위원은 "주치의제도는 과잉의료와 과소의료를 동시에 줄이고, 점점 심해지고 있는 건강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며 "의료기관 간의 과잉 경쟁과 과잉투자로 줄여준다병원이나 종합병원 외래, 혹은 응급실로 가는 횟수를 줄이게 돼 해당 의료기관에서는 중환자나 응급환자에 대한 치료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고 설명했다.

일차의료연구회와 일차보건의료학회는 한국에서 주치의제도를 실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도 제시했다. 충분한 시간과 재정을 투입하고, 충분한 인프라를 갖출 때까지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여건을 조성해야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행히 국회에 '일차의료 발전 특별법안'이 제출돼 있다. 작년 12월 양승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이 법안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차의료의 정착과 확산을 위해 ▲의료전달체계의 개선 ▲일차의료 표준모형을 개발과 보급 ▲의원급 의료기관과 병원급 의료기관 간의 진료 협력체계 활성화 등에 관한 사업을 추진하도록 규정했다. 일차의료 인력 양성을 위한 재정지원과 함께 일차의료를 제공하는 의원급 의료기관에 대한 지원 규정도 담고 있다.

고병수 회장은 "일차의료 관련 법률을 제정하고 정부 산하에 일차의료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각각의 이해당사자가 참여해 주치의제 도입을 위한 논의와 합의를 거쳐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일차의료개혁위원회를 중심으로 일차의료(주치의)를 담당할 인력 증가, 단과전문의 지원 방안, 의뢰체계, 지역사회에서 활동할 간호인력 확보, 지원체계 등을 논의하고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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