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처벌로 얻을 실익 없고, 여성에게만 가혹한 불공정한 일"
[라포르시안]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형법 269조 제1항>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형법 269조 제1항에 규정된 이른바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자 종교계와 생명윤리학계에서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다시 촉발된 가운데 생명윤리학과 철학, 신학 분야 연구자 115명이 낙태죄 폐지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낙태죄의 폐지를 바라는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 연대'는 14일 성명서를 통해 "지난 9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를 요청하는 청원은 낙태를 둘러싼 첨예한 사회적 논의를 다시금 촉발했다"며 "우리는 낙태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이뤄져서 이번 기회에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이 내려지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폭넓은 사회적 논의를 통해 과거의 엄격한 낙태 규제법을 다양한 규정과 제도를 가지고 대체해 왔던 반면, 우리나라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의 낙태 금지조항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며 "몇몇 제한된 경우에 한해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는 규정을 모자보건법에 두긴 했으나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해 대부분의 낙태시술이 불법으로 규정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현실과 법의 괴리는 당사자인 여성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을 뿐 아니라 의료인의 전문직 윤리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지적했다.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생명윤리학과 신학의 특정 관점이 마치 전체 생명윤리학계나 종교계를 대변하는 것처럼 비치는 상황에 대해 우려도 표명했다.
이들은 "생명윤리학계에서는 서구에서 등장한 다양한 이론과 더불어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과 사상에 입각해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낙태에 대해 전향적인 견해를 표명해 왔다"며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뜨거운 낙태죄 폐지 요구에 대해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생명윤리론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 또한 하나의 학문적 견해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낙태가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이를 국가의 법률 조항에 넣어서 모든 낙태를 일괄적으로 규제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며 "우리는 이들의 주장이 전체 생명윤리학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낙태죄 폐지 주장이 곧 모든 낙태를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국가가 법률로써 낙태를 일률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은 생명윤리학의 주된 입장과 거리가 멀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연구자 연대는 "유수한 생명윤리학자들이 낙태의 윤리적 정당성과 관련된 다양한 담론들을 내놓고 있으며, 심지어 기독교 생명윤리학자들 중에서도 국가가 낙태를 법률로 단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며 "이미 낙태를 통해 충분한 고통을 받고 있는 여성을 형법으로 단죄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고, 이는 여성에게만 가혹한 불공정한 일이다. 또 낙태를 불법으로 단죄하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는 데 모두 동의할 뿐"이라고 밝혔다.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사회의 낙태 담론 형성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했다.
이들은 "그동안 낙태에 대한 다양한 윤리적 담론을 공론의 장에 풍부하게 제공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며, 이제라도 다양한 견해와 주장을 연구하고 논의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낙태와 관련된 사회적 논의가 보다 성숙해지고, 나아가 제도적인 개선의 결실로 이어져 수많은 여성들이 처벌의 공포와 죄의식이라는 이중 삼중의 굴레에서 해방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낙태죄의 폐지를 바라는 생명윤리학·철학·신학 연구자 연대> 서명자 명단 강명신(강릉원주대 교수, 철학/생명윤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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