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지연·오진으로 이 병원 저 병원 떠도는 미진단 희귀질환 환자들
"진단·치료 인프라 구축에 정부 적극 개입해야"

2015년 미국에서 제작된 미개봉 독립영화 '진단 받지 못한, 의료난민'(Undiagnosed, 'Medical refugee') 
2015년 미국에서 제작된 미개봉 독립영화 '진단 받지 못한, 의료난민'(Undiagnosed, 'Medical refugee') 

[라포르시안] 최근 언론을 통해 '세가와병(Segawa syndrome)' 환자를 뇌성마비로 오진한 사례가 소개되면서 커다란 논란이 됐다. 이 환자는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고 10년 넘게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다가 몇 해전 뒤늦게 '세가와병' 진단을 받았다.

뇌성마비인줄 알고 재활치료만 받다가 유전자검사를 통해 세가와병 진단을 받고 적절한 약물치료를 했더니 일주일 만에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됐다.

이를 두고 병원의 황당한 오진이 아니냐는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세가와병은 뇌성마비·파킨슨병과 증상이 거의 유사하고, 100만 명에 1명꼴로 발생한 정도로 극희귀질환이라 임상에서 진단하기가 어렵다.

질병관리본부가 운영하는 '희귀난치성질환 헬프라인' 사이트를 보면 "세가와 증후군의 정확한 유병인구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고, 연구자들은 이 증상이 오진되거나 진단되지 않아서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해 놓았다.

무엇보다 희귀질환의 경우 그 희귀성과 낮은 수익성으로 민간차원의 진단·치료법이나 치료제 연구개발이 힘든 대표적인 '시장 실패(market failure)'의 영역이다.  <관련 기사: [네모난 뉴스] 희귀질환자 위해 팔수록 손해보는 제품 만드는 ‘바보 기업들’>

그런 탓에 진단 지연이나 오진으로 여러 병원을 떠도는 '의료 난민'으로 전락해 신체적 아픔과 경제적 비용부담으로 고통받는 희귀질환 환자가 적지 않다.

지난 2015년 미국에서 제작된 미개봉 독립영화 '진단 받지 못한, 의료난민'(Undiagnosed, 'Medical refugee')은 진단 지연이나 오진으로 고통받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현대 첨단 의료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명도 진단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는 미진단 희귀질환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의료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희귀질환재단은 이 영화를 국내에 소개하면서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한 채 난민처럼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도는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에게 최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진단받지 못한 희귀질환자 10명 중 적어도 3명에게 확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이에 필요한 사회적 여건 조성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희귀질환재단 김현주 이사장은 "한국에서는 2~3만 명의 희귀질환자만 실제로 진단받고 등록되어 정부의 의료비지원 정책으로 지원을 받는다. 나머지 수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부분의 희귀질환 환자는 진단받지 못한 채 오진되어 있거나 난민처럼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진단받기 위해 헤매는 안타까운 상황"이라며 "이러한 국내 희귀질환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희귀성, 난치성, 유전성이라는 희귀질환 특성에 근거한 관리법안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 관련 단체들의 호소로 2015년 12월 희귀질환 치료 지원과 예방 및 관리를 위한 인프라 구축을 골자로 한 ‘희귀질환관리법’이 제정됐고 작년 12월 30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희귀질환관리법은 보건복지부로 하여금 5년 단위로 '희귀질환관리에 관한 종합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효과적인 희귀질환관리를 위해 질병관리본부에 '희귀질환지원센터'를 두도록 했다. 희귀질환지원센터는 희귀질환의 진단 및 치료 등에 관한 신기술의 개발·보급과 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복지부가 의료법 관련 규정에 따른 의료기관 중 시설, 인력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곳을 희귀질환전문기관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희귀질환관리법에 따른 희귀질환 전문의료기관 지정은 당초 올 하반기쯤 지정될 것으로 보였으나 해를 넘길 듯 싶다.

앞서부터 의료계에서는 특정 의료기관을 지정해 세가와병과 같은 극희귀질환을 전문적으로 판정하고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을 제기해 왔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에서는 전문병원을 지정해 희귀질환 환자들이 조기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인프라를 구축해 왔다. 특히 미국과 이탈리아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위한 전문병원 및 환자전달체계 구축, 전문의료인력 양성 등을 정책적으로 접근해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희귀난치성질환의 조기진단 및 재활·예방을 위한 중재활동과 질환에 관한 연구 지원 등의 포괄적인 정책이 아닌 의료비 지원이라는 제한적인 정책만 시행해 왔다.

지난 2008년부터 희귀난치성질환의 원인 규명 및 연구를 위해 '희귀질환 진단치료기술 연구사업단'을 발족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희귀난치성질환의 예방, 진단 및 치료에 필요한 연구개발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게 필요하다"며 "특히 환자의 예방, 진단, 치료 및 재활의 접근성을 제고하기 위한 지역거점과 이를 총괄하는 중앙거점 의료인프라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9일 서울성모병원을 방문해 극희귀질환인 '가성 장폐색'을 앓고 있는 유다인(5) 양을 만나 색칠하기를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9일 서울성모병원을 방문해 극희귀질환인 '가성 장폐색'을 앓고 있는 유다인(5) 양을 만나 색칠하기를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복지부, 극희귀질환 전수조사 실시...산정특례 대상 확대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월 9일 서울성모병원을 방문했을 때 극희귀질환인 '가성 장폐색'을 앓고 있는 소아 환자를 만났다. 

장폐색은 소장 또는 대장이 종양 등에 의해 물리적으로 막혀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데 유 양이 앓고 있는 가성 장폐색은 물리적 증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장폐색이 있는 것처럼 장이 수축운동을 하지 못하고, 음식물 등이 장을 통과하지 못하고 적체되는 증상이다.

만성 가성 장폐색은 치료가 가능한 급성 가성 장폐색과 달리 장이식 수술이 사실상 유일한 치료법이다. 장이식 수술을 받지 못할 경우 음식물 섭취가 거의 불가능해 매일 정맥 영양주사(1만5,000원~3만원)를 통해 평생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한다. 비용부담도 클 뿐더러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쉽지 않다.

가성 장폐색은 매년 새로 발병하는 환자 수가 10여명 정도로 추정될 뿐 정확하게 질환 방생 현황에 대한 조사도 이뤄진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만성 가성 장폐색과 급성 가성 장폐색을 구분해 별도 병명으로 분류돼 있지 않아 희귀질환 산정특례(본인부담 10%) 대상에도 제외돼 있어 환자의 의료비 부담이 상당하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현재 '희귀질환'으로 인정하는 법적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데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누락과 사각지대를 없애서 다인이와 같은 극도의 희귀질환도 지원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약속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며칠 뒤 극희귀질환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그 동안 접수된 희귀질환 관련 민원요청과 환우회 및 전문학회 등을 통해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질환대상 환자 수와 진단 기준 등에 대해 전문가와 관련학회의 검토를 거쳐 희귀질환의 적정성 여부를 검토한 후 희귀질환관리위원회 심의를 통해 올해 말까지 희귀질환 목록에 포함할 계획이다.

올해 7월 말 기준으로 산정특례가 적용되는 극희귀질환은 총 66종이다. 그러나 최근 논란이 된 세가와병은 산정특례 적용 대상이 아니다.

앞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월 만성 가성 장폐색 환자 현황을 파악하고, 희귀질환 산정특례 대상에 포함할 수 있는지 여부를 심사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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