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점 다다른 수련병원내 전공의 폭행·성추행...곪아 터질 때까지 방치하는 병원 조직문화

[라포르시안] 질병 이외의 폭력, 안전사고, 중독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해 다치는 손상 환자가 연간 400만명에 달할 정도로 이 문제가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의 '손상감시체계'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손상은 연간 약 400만 건이 발생하며, 이 중 약 30%는 입원을 하고 약 3만 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손상으로 인한 사망이 전체 사망의 약 10.4%를 차지하고 있다.

폭력에 의한 손상이 공중보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보건복지 차원의 정책적 개입 필요성이 높다.

그런데 폭력으로 인한 손상의 위협에 가장 심하게 노출된 곳 중 하나가 바로 병원이다. 그것도 폭력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의사 사회가 폭력에 물들어 있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지도교수와 상급 전공의로부터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인턴의 13.1%가 직장에서 신체적 폭력을, 61.5%가 언어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성 인턴의 경우 27.5%가 성희롱 경험이 있었습니다. 연차가 올라갈수록 상황은 조금 나아졌지만 레지던트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김승섭) 중에서>

고려대학교 보건행정학과 김승섭 교수가 지난 2014년 8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대한전공의협의회 소속 회원 1만1,56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공의 근무환경 및 건강실태조사' 연구 결과에 나온 병원내 폭언.폭력 실태다.

병원 내에서 교수가 간호사나 전공의를 상대로, 전공의 선후배 사이에, 간호사 선후배 사이에 폭언과 폭행과 대물림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 악습은 고질병과 다를 바 없다.

최근 들어 병원내 성추행과 폭언·폭행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불거지고 있다. 더는 숨길 수 없을 만큼 곪아 터진 상처처럼 외부로 표출되고 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에서 교수가 전공의를 성추행하고 장기간에 걸쳐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일로 산부인과 1년차 전공의 2명은 사직한 상태다.

전북의 한 대학병원 정형외과 소속 한 전공의가 선배 전공의와 교수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폭언과 폭행을 당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지난 8월에는 부산대병원 정형외과 교수가 간호사에게 폭언을 하고 전공의를 상습 폭행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jtbc 보도화면 갈무리.
jtbc 보도화면 갈무리.

최근 시작된 국정감사를 통해 드러난 부산대병원 교수가 저지른 전공의 폭행은 도를 넘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유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부산대병원 노조로부터 건네받은 전공의들의 피해 사례 자료에는 폭행으로 온몸에 시퍼런 피멍이 들고 피부가 찢어진 상처도 보였다.

원산폭격을 한 채 교수의 발에 차이거나 뺨을 맞아 고막이 파열됐다는 피해 전공의들의 진술도 있었다. 이런 무자비한 폭력을 휘드른 교수에게 내려진 건 고작 3개월의 정직처분이었다.

이보다 앞서 지난 3월에는 양산부산대병원 모 교수가 전공의들을 상습적으로 성희롱·성추행 한 사건이 병원 노조의 문제제기로 외부에 알려졌다.

비슷한 시기 한양대학병원에서는 교수의 폭행으로 전공의 2명이 잇따라 병원을 이탈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현직 의사가 인턴 시절 자신을 성추행한 지도교수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받았다. <관련 기사: 인턴 근무중 성추행 겪었던 의사 “가해자였던 교수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방송 출연 등으로 이름이 알려졌던 이 정신과 교수는 회식자리에서 후배의사이자 제자인 여자 인턴의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가슴을 만지는 성추행을 저질렀다. 정신과 전문의를 꿈꾸던 그 인턴은 결국 병원을 그만뒀고 전공의 수련도 포기했다.

"바꾸지 않는다면 의사 사회 전체가 암묵적 동조자"

이처럼 지도교수의 폭언·폭행 사건이 잇달아 불거지자 참다못한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얼마전 회원 보호를 위해 전국 수련병원 교육수련부에 수련교육 중 폭언·폭행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공문을 보냈다.

대전협에 따르면 최근 1년 동안 협의회로 접수된 민원의 20%가 병원내 폭언 및 폭력에 관한 내용이다.

대전협은 "20%라는 수치만으로도 크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참고 참다가 겨우 용기를 내서 연락한 전공의들의 수에 불과하다. 이 중에는 견딜 수 없어 사직한 전공의도 있다. 정말 많은 전공의들이 폭언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고 했지만 현실에선 동료이자 선배의사로부터 성희롱과 폭행의 대상으로 전락해 인격을 짓밟힌 의사들이 수두룩하다는 말이다.

병원 노동자들의 폭언·폭행·성희롱 노출은 다른 사업장과 비교해 봐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전국보건의료노조가 실시한 2017년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8.7%가 폭언을 겪었고, 폭행과 성폭력을 경험한 경우도 각각 8.5%, 8.0%에 달했다. 폭언의 가해자가 의사인 경우가 30.9%로 나타났다.

그러나 병원의 폐쇄적인 조직문화 탓에 폭언·폭행·폭력을 겪고도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는 참고 넘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폭언을 겪은 경험자의 82.3%, 폭행 피해 경험자의 67.3%, 성폭력 피해자의 75.9%가 참고 넘어갔다고 응답했다. 병원 노동조합이나 고충처리위원회, 법적 대응이나 제도적 장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응답은 폭언이 1.4%, 폭행이 4.3%, 성폭력이 3.2%에 그쳤다.

폭언.폭행 관련 민원을 제기해도 병원 차원에서 외부로 드러나는 걸 꺼려 쉬쉬하거나 동료를 감싸기 위해 숨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제대로 된 처벌이나 개선이 이뤄지기 힘든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로가 폭언·폭행·성희롱의 '암묵적 동조자'이면서 동시에 '잠재적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셈이다.

성추행이나 폭행 사건이 발생한 후 병원의 소극적인 대응은 이런 병폐를 더 키울 수도 있다. 가해자인 지도교수가 고작 2~3개월의 정직처분에 그칠 경우 피해자인 전공의들은 수련병원을 떠나거나 엄청난 심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앞으로는 비슷한 일이 반복되더라도 더는 외부로 문제를 제기하기 힘든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보건의료노조는 "4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마치기 위해서는 교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기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문제 삼기보다 대부분 참고 넘긴다. 이는 개별 구성원의 인권이 존중받고 보호되지 못하는 폐쇄적인 병원 조직문화를 말해준다"며 "병원은 내부 폭력 사건이 발생할 시 가해자가 누구더라도 철저히 진상을 조사하고 마땅한 징계조치를 취해야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공의 선후배이든, 지도교수와 수련의 관계이든 결국 동료이자 동업자다. 의사가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데 환자와 국민이 의사를 존중해 주길 바라는 건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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