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부족.보호장치 부재로 감정노동 심화..."환자 등 폭언에 방어권 보장해야"

이미지 출처: SBS스페셜에서 방송한 '가면 뒤의 눈물' 속 한 장면.
이미지 출처: SBS스페셜에서 방송한 '가면 뒤의 눈물' 속 한 장면.

[라포르시안] “저는 환자분이 때리면 맞아야 한다고 배웠어요. 머리가 안 좋고 인지가 떨어지기 때문에 침을 뱉든 때리든 웃으면서 치료하라고 배웠죠.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그러다 보니 삐에로가 돼서 환자가 뭘 하든 하하하하 하게 됐어요." (A대학병원 소속 물리치료사)

“제가 바쁘고 바로바로 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나오니까, ‘잠시만요’, ‘잠시만요’ 이렇게 잠깐 시간을 두는 거예요. 사람들의 요구는 ‘내가 제일 아픈 사람이고 제일 위급한 사람이니까 내 껄 먼저 해결해’에요. 나도 담당 환자가 다섯 명 줄면, 더 웃어주고 대화도 할 수 있죠. 내가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좀 해결되지 않을까” (B대학병원 소속 간호사)

병원에서 근무하는 보건의료산업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심층 면접조사 과정에서 나온 실제 사례들이다.

다소 충격적인 업무환경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병원에 근무하는 보건의료 노동자들에겐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아무리 자주 겪어도 감정적으로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다 보니 간호사를 비롯한 많은 보건의료 노동자가 높은 감정노동 수행으로 탈진증후군(Burnout Syndrome) 상태에 빠졌다.

병원에서는 적정 인력확충이나 노동환경 개선도 없이 무조건 의사와 간호사 등의 의료진에게 친절을 강요하면서 각종 평가를 앞세워 실적경쟁으로 내몬다. 그 과정에서 직무스트레스는 커지고 과도한 감정노동에 따른 심리적 탈진 상태에 빠지게 된다.

감정노동에 따른 심리적 탈진 상태에서 빠져도 병원 내에서 대처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병원은 환자와 보호자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고객이라고 강조할 뿐 합리적인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결국 다른 병원으로 이직을 하거나, 이 일을 그만두는 거다.

2년 전 전국보건의료노조가 실시한 '보건의료 노동자 노동실태조사'에서 환자나 보호자를 상대하는 현재 업무가 '좌절감과 지겨움'을 주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5%에 달할 정도였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보건의료 노동자들한테서 타인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자신들이 '감정의 쓰레기통' 같은 존재라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감정노동 심화 원인은 '병원내 인력부족과 열악한 근무환경' 

지난 19일 국회에서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서울노동권익센터가 공동 주최하고 보건의료노조가 주관한 가운데 보건의료산업 종사자의 감정노동 문제의 개선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보건의료산업에 종사하는 다양한 직종의 1,8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와 함께 심층 면접조사 분석 결과가 소개됐다.

공선영 사회건강연구소 연구위원은 '보건의료산업 노동자의 감정노동 실태조사 분석' 결과를 통해 병원 내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인력부족 등으로 심각한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노동에 따른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줄 수 있는 치유프로그램이 부재한 상황을 짚었다.

공 연구위원의 실태조사 분석 결과에 따르면 병원내 간호사 등 여성노동자의 경우 ▲감정조절의 요구 및 규제 요인 ▲환자 응대의 과부하 및 갈등 ▲감정부조화 및 손상 요인 ▲조직의 감시 및 모니터링 ▲조직의 지지 및 보호체계 등 5가지 요인에서 위험집단의 비율이 50~60%에 달해 남성(20~40%)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표 출처: '보건의료산업 노동자의 감정노동 실태조사 분석' 보고서(공선영 사회건강연구소 연구위원)
표 출처: '보건의료산업 노동자의 감정노동 실태조사 분석' 보고서(공선영 사회건강연구소 연구위원)

병원내 여성노동자의 위험집단 비율은 ‘감정조절의 요구 및 규제’에서 65.5%로 가장 높게 나타나 업무상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실제 감정을 숨기고 억압하는 등 감정조절에 과도한 노력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감정노동을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직종별로 보면 여성간호사(69.3%)와 여성 사무행정원무직(74.2%)의 ‘감정조절의 요구 및 규제’요인에서 위험집단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표 출처: '보건의료산업 노동자의 감정노동 실태조사 분석' 보고서(공선영 사회건강연구소 연구위원)
표 출처: '보건의료산업 노동자의 감정노동 실태조사 분석' 보고서(공선영 사회건강연구소 연구위원)

'환자 응대의 과부하 및 갈등' 요인에서도 여성노동자의 위험집단 비율은 55.7%(남성 28.2%)에 달했다. 직종별로는 여성 사무행정원무직(66.2%)과 간호사(59.9%), 전공의(59.7%)의 위험집단 비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감정부조화 및 손상' 요인에서 위험집단 비율도 여성노동자는 56.1%(남성26.5%)로 높은 수준을 보였다. 직종별로는 여성 사무행정원무직(64.1%)과 간호사(62.4%)의 위험집단 비율이 높았다.

병원내 업무관련자에게 느끼는 감정노동의 정도에 관한 조사도 이뤄졌다.

조사결과 보건의료산업 노동자들이 업무관련자로부터 느끼는 감정노동의 정도는 '환자(보호자) > 상사(의사) > 타 직종·부서 직원 > 부서 내 직원 순이었다.

환자(보호자)로부터의 감정노동은 간호사가 6.1점으로 가장 높았는데, 이는 환자나 보호자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알게 된 정보를 무분별하게 주장한다거나 다른 병원과 비교해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상황에서 병원이 경영적인 측면에서 친절한 서비스 제공을 강요하는 데서 오는 직무 스트레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공의 직종은 병원내 상사(의사)로부터 느끼는 감정노동의 정도가 5.95점으로 가장 높았다.

보건의료산업 노동자들은 과도한 감정노동을 하게 되는 원인으로 인력부족과 과중한 업무량, 환자와 보호자의 부당한 언행 및 요구 그리고 열악한 근무환경(장시간노동, 교대근무 등) 등을 꼽았다.

감정노동 수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병원내 감정노동 보호제도 시행율은 상당히 낮았다.

감정노동 보호제도 시행률을 보면 ▲잠시 업무를 중단하고 자리를 피하도록 제도화(13.6%) ▲피해상황 대응 매뉴얼 보급(16.5%) ▲피해상황 시 후선으로 인계해 처리하도록 제도화(14.5%) ▲직원 피해 시 고소/고발 지원제도(19.7%) ▲직원을 위한 심리상담실 운영(22.5%) ▲감정노동 고충처리제도(16.7%) ▲감정노동 휴가 부여(7.1%) 등에 그쳤다.

감정노동에 따라 고충을 해소하기 보호하기 보다는 오히려 환자 또는 보호자의 항의가 제기됐을 때 '징계나 해고 등의 위협', '시말서(반성문) 요구', '업무외 시간에 추가 교육', '환자 또는 보호자에게 직접 전화해서 사과하기' '남들 앞에서 모욕 주기' 등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병원내 노동자의 과도한 감정노동과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부재는 결국 낮은 직장 만족도(5점 만점에 2.77점)와 높은 이직의도('지난 1년간 현재 일을 그만 둘 생각을 한 적 있다' 68.6%)로 이어졌다.

감정노동 개선대책을 묻는 조사에서 ‘환자(보호자)가 폭언, 성희롱, 폭력을 행사할 때 피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는 항목(3.74점)의 요구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악성환자(보호자)를 전담하는 부서(전담자)가 필요하다’(3.61점)는 요구도 역시 높았다.

실태조사를 수행한 공선영 사회건강연구소 연구위원은  "감정노동 개선대책을 묻는 조사에서 ‘환자(보호자)가 폭언, 성희롱, 폭력을 행사할 때 피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는 항목은 감정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방어권’에 관한 내용"이라며 "방어권은 감정노동자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손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방어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면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으로 인한 피해가 상당히 감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지난 9월 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보건의료산업 감정노동 실태 분석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 제공: 전국보건의료노조
지난 9월 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보건의료산업 감정노동 실태 분석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 제공: 전국보건의료노조

"일상화된 감정적 탈진...병원 방관과 감정노동 문제 해결의 개별화 탓"

이날 토론회에서는 김향수 연구원(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은 보건의료산업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심층 면접조사 분석을 통해 감정노동의 실태와 원인을 파악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심층 면접조사는 간호사, 간호조무사, 의료기사와 물리치료사, 원무행정직, 정신건강증진센터 노동자 등 6개 직군에서 모두 19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김 연구원은 심층 면접조사 분석을 통해 병원내 노동자의 감정노동 특성으로 ▲환자 중심 감정조절로 감정노동 심화 ▲충분히 응대할 수 없는 높은 노동강도로 감정노동 심화 ▲민원에 대한 민감성으로 인한 감정노동 심화 ▲문제해결의 개별화로 감정 소진 등을 제시했다.

"일단 바쁘니까 친절해질 수가 없어요. 노력해도 바쁜 상황이 되니 속이 타들어가죠. 천천히 말하고 천천히 하라 이야기 하지만 표정은 숨길수 없어요. 미국은 30분에 1명인데, 우린 1시간에 10명 11명. 설명을 못하고 불친절하게 되죠.” (심층면접 참여 방사선사)

위의 인터뷰 내용처럼 업무량으로 인해 대면서비스 시간이 줄어들어 환자와 그 보호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어 생기는 불만으로 감정노동이 심화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병원의 대처가 퇴원시켜버리거나 하는 게 아니라 환자가 난리치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예요. 결국 목소리만 큰 사람이 이기죠. 불합리해도 큰소리만 치면 다 되요.” (심층면접 참여 간호사)

대다수 병원이 환자나 보호자에 의한 민원 발생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민원 발생을 줄이는 데만 집중하는 경영방침과 민원 발생 시 노동자에게 잘못을 묻는 관행으로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이 심화된다는 점도 꼽았다.

“경찰에 신고는 해서 고소하긴 했으나 결국엔 흐지부지 되었어요. 병원에서 나를 보호해줄 그런 매뉴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맞았을 때 병원 사람들이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구나, 나는 내 스스로 보호 받아야 되는구나, 그리고 내가 맞았을지언정 나는 일을 계속해야 되는구나, 되게 자괴감에 빠졌었거든요. 내가 왜 이일을 하고 있나, 나는 이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심층면접 참여 간호사)

그리고 감정노동 피해에 대한 문제해결이 병원 차원이나 제도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피해 당사자가 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구조이다보니 감정노동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면접참여자들은 감정노동 심화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실적과 친절을 강요하는 병원조직문화 개선 ▲적정 휴게시간 보장 및 감정노동 피해 발생 시 방어권 보장, 이를 가능케 하는 인력 확충 ▲감정노동 피해 대응 매뉴얼과 휴게 공간 확보 ▲감정노동 피해 대응 교육 및 심리상담 제공 등을 제시했다. 

김 연구원은 "심층면접을 하면서 전문직이라는 사회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면접참여자들이 이야기한 감정노동 피해가 심각하고, 일상화 돼 있다는 점에서 놀았다"며 "보건의료산업 노동자들의 감정노동 피해의 심각성, 그리고 일상화된 감정적 탈진은 감정노동 피해에 대한 병원의 방관과 노동자에게 책임을 묻는 관행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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