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아서 비후성 심근증 원인인 유전자 교정...생명윤리 논란 이어질 듯

[라포르시안] 한국과 미국 공동연구진이 ‘유전자 가위’로 불리는 유전자 편집 기법(크리스퍼/카스9)을 이용해 인간 배아에서 유전자 돌연변이를 교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인간 배아의 유전자 편집을 둘러싼 생명윤리 논란이 또다시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은 유전체 교정 연구단의 김진수 단장 연구팀이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 대학(OHSU) 미탈리포프(Mitalipov) 교수 연구팀 등과 공동으로 인간배아에서 비후성 심근증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교정하는데 성공했다고 3일 밝혔다.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인간 배아에서 유전질환을 교정한 건 이번이 세계 처음으로, 연구 결과는 '네이처'지 온라인판에 3일 공개됐다.

비후성 심근증은 선천적으로 좌심실 벽이 두꺼워지는 심장질환으로 인구 500명 중 1명의 비율로 발생한다. 심부전 증상이 동반되고 젊은 나이에 돌연사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11번째 염색체에 존재하는 MYBPC3 유전자 변이가 망가지면서 발생한다.

유전적으로 발병할 확률이 높지만 성인이 되기까지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 있으며, 다음 세대로 유전자가 전달될 확률이 높은 편이다.

가족성 비후성 심근증의 경우 부모 중 한 명이 변이 유전자를 보유할 경우 자녀에게 유전될 확률이 5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공동 연구진은 이번에 인간배아 유전자교정을 통해 비후성 심근증 변이 유전자가 자녀에게 유전되지 않을 확률을 자연상태의 50%에서 72.4%로 높였다.

이번 연구에서 크게 주목할 사항은 유전자가위 도입 방식에 따른 유전자 교정 효율 향상과 모자이크 현상 제거 효과이다. 난자와 정자가 수정된 후, 유전자가위를 적용하는 방식(그림 위)이 아닌 난자에 정자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동시에 주입하는 경우(그림 아래) 모자이크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미지 제공: 기초과학연구원
이번 연구에서 크게 주목할 사항은 유전자가위 도입 방식에 따른 유전자 교정 효율 향상과 모자이크 현상 제거 효과이다. 난자와 정자가 수정된 후, 유전자가위를 적용하는 방식(그림 위)이 아닌 난자에 정자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동시에 주입하는 경우(그림 아래) 모자이크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미지 제공: 기초과학연구원

이번 연구에서 IBS 박상욱 연구위원은 배아 실험에 사용할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제작해 제공했다. 인간배아에 유전자가위를 도입하고 교정하는 실험은 미국 OHSU 연구팀이 수행했다

OHSU 연구팀이 11번째 염색체에 존재하는 MYBPC3 유전자 변이가 있는 환자로부터 얻은 정자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정상인의 난자에 도입하는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한 결과, 수정 시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난자의 대립 유전자가 변이가 일어난 대립유전자를 교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외부 DNA 도입 없이도 유전자 가위만을 적용해 유전자교정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이로써 부모 중 1명이 비후성 심근증을 갖고 있을 경우 자녀가 비후성 심근증에 걸릴 확률이 50%에서 27.6%로 줄어들었다.

IBS 연구진은 인간 배아에 적용된 유전자 가위의 정확성을 평가하기 위해 절단 유전체 시퀀싱(Digenome-seq) 기법과 전 유전체 시퀀싱(Whole Genome seq)기법으로 유전자 가위가 적용된 배아의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절단 유전체 시퀀싱에서 절단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한 23개의 비표적 절단 위치(potential off target) 중 어떤 곳에서도 유전자 가위가 오작동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오리건 대학 연구진은 정상인 난자에 변이 유전자를 지닌 정자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동시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모자이크 현상을 해결했다. 이미지 출처: 오리건 보건과학 대학 연구진의 실험 영상에서 제공.
오리건 대학 연구진은 정상인 난자에 변이 유전자를 지닌 정자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동시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모자이크 현상을 해결했다. 이미지 출처: 오리건 보건과학 대학 연구진의 실험 영상에서 제공.

무엇보다 이번 연구는 유전자 교정의 난제로 꼽히는 '모자이크'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기존에는 수정 후 유전자가위를 주입해서 같은 배아에 유전자가 교정되지 않은 세포가 섞여있는 모자이크 현상이 발생했다.

김진수 단장 연구팀은 정자와 유전자 가위를 동시에 난자에 주입하는 방법으로 모자이크 현상을 극복했다.

김진수 단장은 "유전자 교정에 있어 난제였던 모자이크 현상을 유전자가위 도입방식을 달리해 해결했다는데 기술적 진전이 있다"며 "향후 다양한 유전질환의 발병 기전을 밝히는 연구에 참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실험을 주도한 미탈리포프 교수는 "유전자 교정의 안정성이 증명된다면 유전질환을 갖고 있는 가족들의 부담은 물론 인류 전체의 부담을 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생명윤리학회, 4일 '인간배아 유전자 편집 긴급 집담회' 개최

한편 미국 OHSU 연구팀은 미국 국립과학원과 국립의학원의 가이드라인과 기관 자체 가이드라인 및 과학윤리위원회 검토 등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인간배아 유전자교정 실험을 안전하게 수행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은 유전적 난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에 한해 기초연구에 인간배아와 생식세포를 연구대상으로 다루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박상욱 연구위원은 "인간 배아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민감한 주제인 만큼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다"며 "하지만 논문 심사 과정에서 생명윤리분야 심사위원이 '생명윤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매우 잘 지켜졌다'라고 심사평을 달아준 점은 매우 고무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인간 배아의 유전자 교정에 대한 안전성과 유효성, 그리고 생명윤리 논란이 거세게 일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인간 배아의 유전자 교정에 있어서 여전히 안전성과 유효성이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미국에서는 1999년 유전적 대사장애를 앓고 있던 18세 소년이 유전자 치료 과정에서 과도한 면역 거부 반응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지난 2003년 1월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유전자치료를 받던 환자가 백혈병에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국에서 진행중인 27건의 유전자치료를 전면 중단시키기도 했다.

또 지난 2015년에는 중국의 과학자들이 CRISPR/Cas9라는 유전자편집 기법을 이용해 생존불가능 배아(non-viable embryo)의 DNA를 짜깁기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인간 배아 유전자 편집을 둘러싼 생명윤리 논란이 제기됐다.

반면 인간배아의 유전자편집이 중요한 과학적 의문을 해결하는데 엄청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관련 연구가 계속돼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국제 생명윤리 전문가 모임인 '힝스턴 그룹'(hinxtongroup.org)은 2015년 9월 발표한 성명서에서 "공개토론과 신중한 정책이 요구되지만 인간의 초기발생과정 및 질병을 연구하는 데 큰 통찰력을 제공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인간배아 유전자 편집의 윤리적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성명서 바로가기>

이런 가운데 한국생명윤리학회는 오는 4일 서울아산병원에서 한미 공동연구진의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인간배아 유전자 돌연변이 교정 연구성과와 관련해 '인간 배아 유전자 편집 긴급 집담회'를 열 예정이다.

생명윤리학회는 이날 긴급 집담회를 통해 인간 배아 유전체 편집 사례를 분석하고, 유전체 편집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제언을 내놓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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