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A, ‘헬싱키선언’ 7차 개정 논의…“임상연구서 플라시보 허용 제한이 쟁점”

▲ 빌클린턴 전 대통령과 '터스키기 매독 연구'의 생존자. 사진출처 : 미국 CDC 홈페이지

"이미 저질러진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는 침묵을 끝내야 한다.……우리는 눈으로 당신들을 볼 수 있고 마침내 나는 미국 국민을 대신해 미국 정부가 행한 일이 수치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하고자 하며,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1997년 5월 16일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른바 '터스키기 매독 연구'(Tuskegee Syphilis Study) 피해자들에게 한 사과 발언 중 일부이다.

터스키기 매독 연구는 1932년 시작돼 1972년까지 40년간 진행된 의학 역사상 최악의 임상시험으로 꼽힌다. 이 임상연구는 미국 남부의 앨라배마주 터스키기 인근에거주하는 400명의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진행된 매독의 자연적 진행경과와 그것의 치료에 관한 것이었다.

문제는 임상연구 과정에서 연구진들은 피험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고, 특히 연구가 진행되는 단계에서 매독을 치료할 수 있는 페니실린이 개발됐지만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험자들의 치료를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그 대신 매독의 치명적인 경과를 관찰하기 위해 많은 환자들에게 가짜 치료(placebo treatment)를 처방했다.

이 연구가 종료될 무렵, 400여명의 피험자 중 74명만이 생존해 있었다. 28명은 매독으로, 100명은 관련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남자 피험자의 부인 중 40명이 매독에 감염되었고, 그들의 자녀 중 19명이 선천적으로 매독에 걸린 채 태어났다.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정부를 대신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시점에는 터스키기 매독 연구 피험자 중 오직 5명만이 생존해 있었다.

터스키기 매독 연구는 의학연구에 있어서 연구자의 생명의료윤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되새기게끔 하는 사건이었다.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의사회(WMA) 제18차 총회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연구의 윤리원칙으로 '헬싱키선언'이 채택되었다.

오는 2014년 헬싱키선언 채택 5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개정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재개정 논의의 핵심은 임상시험에서 플라시보(Placebo, 위약) 허용 여부에 관한 것이다.

앞서 2008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의사회(WMA) 총회에서는 임상시험 과정에서 일정한 조건 하에 플라시보 사용을 허용하는 '헬싱키선언 6차 개정안'이 채택된 바 있다.

당시 총회에서 채택된 6차 개정판에는 '치료를 겸한 의학연구에 관한 부가 원칙' 부분의 32조 항목에 ‘위약 사용 남용을 막기 위해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로 삽입됐다.

그러나 서울 총회에서 브라질 등 남미국가의 의사회 대표들은 "위약 사용을 허용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임상시험을 위해 문을 열어두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반면 다른 많은 국가들이 임상시험을 위해 플라시보 사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결국 표결을 통해 제한적으로 위약 사용을 허용하는 쪽으로 채택됐다.

서울 총회에서 개정된 32조에는 '위약을 사용하거나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은 현재 입증된 시술이 존재하지 않는 연구에서 수용될 수 있다. 또는 설득력 있고 과학적으로 타당한 방법론적 이유로 인해서 치료의 효능과 안전성을 결정하기 위하여 위약 사용이 필요하고, 위약을 받거나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는 환자에게 심각하거나 비가역적인 해악의 어떤 위험도 없을 때 수용할 수 있다. 이런 선택을 남용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하여야 한다'고 명시해 놓았다.

▲ 사진 출처 : 청와대 홈페이지

WMA, '헬싱키선언' 7차 개정 논의이런 가운데 세계의사회는 내년도 헬싱키선언 채택 50주년을 앞두고 플라시보 사용 허용에 대한 추가 개정을 진행하고 있다.

19일 의료계에 따르면 이달 28일부터 오는 3월 1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는 세계의사회에서는 헬싱키선언 개정을 위한 전문가 컨퍼런스(WMA Expert Conference on the Revision of the Declaration of Helsinki)가 열릴 예정이다.

이번 전문가 컨펀런스에는 국내에서 연세대의대 신동천 교수(예방의학교실)와 가톨릭의대 최보문 교수(정신과학교실 교수, 한국의료윤리학회 회장) 등이 참석한다.

최보문 교수는 이번 컨퍼런스에서 '취약한 피험자'(Vulnerable groups)의 보호 방안을 주제로 발표를 가질 예정이다.

최보문 교수는 "지난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이뤄진 헬싱키선언 6차 개정에 이어 7차 개정이 논의되고 있다"며 "7차 개정 논의의 핵심은 임상연구에서 플라시보 사용 허용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2008년 6차 개정에서도 플라시보 하용 허용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며 "이달 말 일본에서 논의를 통해 오는 5월경 개정판을 공개해 의견을 수렴하고 올 연말쯤 최종 개정판이 공개될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현재 남미 등의 국가를 중심으로 임상연구에서 플라시보 사용 허용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를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 컨퍼런스에 좌장으로 참여하는 신동천 교수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임상연구시 위약 사용을 당연시하고 있지만 이와 반대되는 의견도 적지 않다"며 "특히 남미 등의 국가에서는 플라시보 허용이 저개발 국가를 임상시험 대상국가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난도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비난은 다국적 제약사인 화이자가 지난 2006년 나이지리아 어린이들에게 검증되지 않은 신약을 투여하는 임상시험을 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더욱 철저한 임상연구 윤리가 요구되는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이 때문에 이번 7차 개정 논의에서는 임상연구에서 플라시보 사용 허용을 더욱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신 교수는 "일각에서는 플라시보를 사용하지 않고도 비교군을 만들어서 얼마든지 임상시험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기한다"며 "이번 7차 개정을 통해서는 플라시보 사용을 허용하는 조건이 지금보다 굉장히 까다로워지는 쪽으로 이뤄질 것 같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의학 전문가들 중 상당수가 임상연구에서 위약 사용 허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위약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시험약의 효과가 과대포장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난번 서울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총회에서도 "치료 효과가 35%이고 플라시보 효과가 30%인 경우도 있다”며 “플라시보 사용은 민감한 문제이지만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임상연구에 있어서 플라시보 사용 허용을 둘러싼 문제는 헬싱키선언 7차 개정을 계기로 또다시 전세계 의학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의료윤리 문제로 부각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는 지난 2008년 펴낸 '의학논문 출판윤리 가이드라인'를 통해 임상연구에서 위약 사용에 따른 주의사항을 제시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위약 사용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되는 경우는 현재 알려졌거나 가능한 치료가 없는 질환의 임상시험으로, 이러한 때에도 윤리위원회나 연구자들은 위약을 사용하는 연구에 참여하는 피험자가 효과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요소가 없는지 면밀히 검토하고 주의해야 한다.

특히 연구 대상이 되는 질환이 치명적이거나 심각한 경우 위약보다 우수한 치료가 이미 있다면 연구에서 위약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난치병이거나 심각한 질환의 경우 실험적 치료의 효능을 입증할 만한 증거나 나타난 이후에도 피험자를 계속 위약군에 배정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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