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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현장에서 노동자로부터 배운 어느 일본인 의사의 기록[신간] '생명의 증언' 한국어판 발간...일본의 이황화탄소 중독증에서 원진레이온 직업병까지

[라포르시안] '산업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라마찌니(Bernardino Ramazzini, 1633~1714년)는 18세기 초 '노동자의 질병'이란 책을 냈다.

라마찌니는 이 책을 통해 광부부터 도자기공, 석공, 레슬링 선수, 농부, 간호사, 군인 등 52개 직종의 노동자들이 겪을 수 있는 건강 문제를 다뤘다. '노동자의 질병'은 나중에 산업재해 보상법이 제정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구에서는 300년 전부터 노동자의 건강문제에 의학적인 개입을 하려는 노력이 시작됐지만 한국 의료에서 노동자의 건강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산업화의 역군'으로 불린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다.

그러다 1988년 열다섯 살의 어린 노동자 문송면이 '수은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해에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산업재해로 불리는 원진레이온의 집단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이 뒤늦게 드러났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가 노동자의 건강권과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노동환경 개선 필요성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관련 기사: 28년 전 문송면을 대신해 묻는다…“이 나라는 왜 그대로인가”>

하지만 여전히 한국사회가 노동자의 건강문제를 다루는 인식은 척박하다.

지난해 1월 핸드폰 부품을 생산하는 하청업체 2곳에서 근무하던 파견노동자 4명이 환기장치도 없는 공간에서 보호장비도 갖추지 않은 채 작업을 하다가 급성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 그 증거다. <관련 기사: 산업단지 인근 병원 의사분들께…“환자 직업력 꼭 물어봐 주세요”>

수많은 산업재해 피해자와 직업병 환자는 여전히 국가의 통계에도 포함되지 못한 채 직업병으로 일터를 잃고 목숨까지 잃고 있다.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 거리로 나서 투쟁해야 하는 풍경은 변함이 없다.

한국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끔찍한 산업재해 실태를 되돌아보게끔 하는 책이 나왔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이 발간한 '생명의 증언'이란 제목의 책이다. 

요시나카 다케시라는 일본인 의사가 쓴 책의 한국어 번역판으로, '일본의 이황화탄소 중독증에서 원진레이온 직업병까지'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산업재해 현장과 진료실에서 의사인 저자가 직접 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인 요시나카 다케시는 일본 교토대학 의학부 출신의 순환기 내과 전문의로, 2002년부터 교토 민의련 중앙병원 원장과 교토대학 의학부 임상 교수,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 부회장을 지냈고, 2013년부터 교토부 보험의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이 책에는 저자가 1980년대 중반 교토부 우지시(宇治市)의 유니치카 우지 공장에서 발생한 만성 이황화탄소 중독 피해 노동자를 만나 직업병으로 인정받도록 싸운 과정을 풀어 놓았다.

장기간 직업적으로 이황화탄소에 노출될 경우 동맥경화성 혈관 장애가 생기고, 그로 인해 다발성 뇌 경색, 뇌 출혈 등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1980년대 중반 이후 10여 년 동안 저자의 주도적 노력을 통해 밝혀내는 과정이 의학적으로 자세히 묘사돼 있다. 

특히 일본에서 재생섬유를 만드는 레이온 제조 시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에 수출됐는지 분석하고, 1980년대 한국에서 발생한 원진레이온의 집단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을 중심으로 산업재해 인정 투쟁 활동도 자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저자는 일본의 레이온 공장 노동자들을 직접 진료한 경험을 통해 환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의 이야기 속에 의료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의 노동자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의 모든 노동자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는 가장 기본적 인권으로 보장해야 하고, 의료가 이를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이 책에서 강조한다.

울산대 의과대학 직업환경의학교실의 김양호 교수는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국내에서 이황화탄소 중독 문제를 제기하는 데 일조했던 구로의원의 생활로 돌아간 듯 했다"며 "일본에서 발생한 이황화탄소 중독이 레이온 생산시설과 함께 한국으로 수출돼 국내에서 이황화탄소 집단 중독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의료 전문인으로서 안타까워 산재 직업병 예방 및 대책을 위한 한일 연대 활동에 매진하고, 나아가 원진 레이온 설비가 중국으로 재수출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지식인의 면모를 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의료의 올바른 모습에 관심 있는 일반인, 산재 직업병 활동가, 산업보건 전문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고 당부했다.

이 책의 번역은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 참여를 계기로 현재 녹색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찬호 사무처장이 맡았다.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 진단에 관계했고 녹색병원 원장을 역임한 양길승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이 감수를 했다.

김상기 기자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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