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생존자 투병경험에 대한 질적 사례연구' 발표..."치유의 주체로서 인식하는 것 중요"

한 대학병원 암병원의 '암환자 전용 응급실' 모습.
한 대학병원 암병원의 '암환자 전용 응급실' 모습.

[라포르시안] 전국단위 암발생 통계를 산출하기 시작한 1999년 이후 암 진단을 받고 현재 치료 중이거나 완치 후 생존하고 있는 암 생존자가 140만명을 넘어섰다.

암 치료를 경험한 생존자는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정서적.사회적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치료 전후로 심한 우울증과 재발 불안감에 시달리거나 완치 후에도 사회복귀에 어려움을 겪기 쉽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이들 암 생존자의 투병 이후 삶까지 돌볼 수 있는 사회적 지지체계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중년기 연령대에 암 진단을 받고 투병과정을 경험한 생존자들의 삶을 심층적으로 탐색한 연구결과가 나와 눈길을 끈다.

그동안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보장성이나 의료지원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암 생존자의 삶을 다룬 연구결과는 드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박지숭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 발간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사회연구'(제37권 제2호)지에 '중년기에 암 진단을 받은 후 생존한 사람들의 투병경험에 대한 질적 사례연구'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박 연구원은 뉴욕 주립 대학교 올버니(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Albany)에서 사회사업학 석사학위와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연구에서 질적 사례연구 방법을 통해 중년기에 암을 진단 받았던 생존자 6명의 투병경험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6명의 연구 참여자는 박 연구원이 스웨덴 예블레 대학(Gävle University)과 공동으로 ‘암 환자들의 영성적 대처’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국제비교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33명의 한국 참여자 중 일부이다.

연구 참여자들은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중노년층 성인 남녀로, 남성이 4명, 여성이 2명이다. 연구 참여자들이 암 진단시 담당의로부터 통보받은 암 단계는 재발 또는 전이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2~4기의 진행암과 말기암 단계였다.

연구 참여자들은 신뢰관계에 있는 의료사회복지사 및 간호사를 통해 자발적으로 연구에 참여했고, 각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암 투병경험과 관련해 개인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능한 조용하고 안락한 장소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박 연구원은 인터뷰 결과를 바탕으로 참여자들의 암 투병경험을 개별적으로 분석하면서 개인별로 나타나는 중요한 이슈를 파악하고, 사례를 지속적으로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의 개별적 경험에서 공통되는 몇 가지 중요한 주제를 발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참여자들의 개별적인 경험들로부터 ▲치유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로서의 나의 몸 ▲위대한 포기로서의 욕망의 체념(諦念)▲자식을 두고 떠나는 슬픔 ▲세상과사람과의 관계재설정 ▲자기 내부에서 허물 찾기 ▲몰입을 통해 암을 무화(無化)시키기 ▲자연과 생명의 숭경(崇敬) ▲병 앞에 당당함 등 여덟 개의 공통 주제가 드러났다.

우선 암 생존자들은 자기 몸에 대한 주권회복이 암 투병경험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인인 것으로 확인됐다.

논문은 "참여자들의 경험으로부터 자기 몸에 대한 주권회복이 암 투병경험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임이 드러났다. 참여자들은 의료진의 처방을 기본적으로 믿고 따랐지만 내몸의 주인은 나, 자기 치유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며 "항암치료 과정을 거치는 것은 내 몸에 대한 주체성을 상실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 온 중년의 참여자들에게 자기 몸에 대한 주체성은 자기 삶에 대한 주체성 못지않게 중요한 이슈였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암 환자들을 대하는 의료진 또는 사회복지 현장 실무자들은 환자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몸의 치유를 위해 의료적 접근 이외에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경청하고, 치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는 방식이나 특수한 민간요법이 아니라면 최대한 환자의 선택을 지지해 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암 환자들이 암이라는 질병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에 몰입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이뤄진 선행연구에서 암 환자들이 암이라는 질병자체보다는 현재를 사는 것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통해 정상화를 경험한다는 분석과 같은 맥락이다.

논문은 "연구 참여자들은 서각, 스포츠 활동 등에 몰입하면서 암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리는 전략을 취했는데, 신앙에 의지하며 절대자에게 몰입하는 것도 이 전략에 포함된다"며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암 환자들이 각자 좋아하는 활동을 찾아 몰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다양한 취미 여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암 환자의 투병 과정에서 가족 및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논문은 "중년기에 암이라는 예기치 못한 삶의 위기를 맞은 참여자들에게 죽음보다도 두렵게 느껴진 것은 자식, 손주들을 두고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로서 부양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손주들이 자라는 모습을 다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슬펐다"며 "참여자들에게 자식은 살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되었고 이것이 병을 이겨내는 동기부여로 작용했다. 기존 연구들은 암 환자들의 삶을 자녀와 연결지어 이해하는 관점이 부족한데 이번 연구를 통해 중년기 암 투병경험에 있어 자녀와의 맥락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 참여자들은 암을 계기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세상과 화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암 생존자가 다른 암환자의 멘토링을 통해 더 깊은 공감과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논문은 "암을 겪은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 봉사하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된다. 동료 멘토링을 제공한 위암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질적 연구에서도 암 투병경험이 있는 생존자들의 멘토링을 통해 암 환자들이 더 깊은 공감과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보고했다"며 "이렇게 볼 때, 암 생존자들과 암환자들을 이어주는 동료상담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암 환자들이 관계 속에서 정서적 지지를 얻고 치유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표 출처: '보건사회연구'(제37권 제2호)지에 게재된 '중년기에 암 진단을 받은 후 생존한 사람들의 투병경험에 대한 질적 사례연구' 논문
표 출처: '보건사회연구'(제37권 제2호)지에 게재된 '중년기에 암 진단을 받은 후 생존한 사람들의 투병경험에 대한 질적 사례연구' 논문

암 생존자들의 투병과정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자연의 치유력에 대한 숭경(崇敬)이었다. 일부 참가자는 암과 투병해서 완치판정을 받기까지 자연의 치유력이 큰 힘이 되었다는 확신을 보였다.

논문은 "참여자들은 종교에 상관없이 자연을 숭경의 대상으로 인격화했고, 생명을 관장하는 자연 앞에서 겸허한 존재가 되어 소통하려고 노력했다"며 "이들에게 자연은 암 투병으로 인한 스트레스, 마음의 상처, 번민을 비울 수 있게 해 주고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채워 주는 치유자였다. 서양 의학의 관점에서는 자연의 치유력에 대한 암 환자들의 믿음이 미신 또는 비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중년의 우리나라 암 환자들에게 자연은 병을 낫게 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자연의 치유력에 의지하는 것은 의학적 개입의 효과를 최대화시킬 수 있는 환자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며 "중년층 암 환자들의 치유를 돕기 위해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제공하는 것을 고려해 볼만 하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번 연구결과는 일부 암 생존자의 경험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중년기 암을 극복한 생존자들 전체로 확대해서 적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참여자들은 암을 진단받은 시점으로부터 평균 5년 뒤 완치판정을 받고 과거의 힘든 시간을 회고하며 투병경험을 진술했기 때문에 항암치료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암 환자들의 경험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박 연구원은 "비록 적은 수의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지만 중년기의 암 투병경험을 심층적으로 탐색했다는 점에서 연구의 희소가치가 있으며 학문적 공백을 채우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