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민주주의 강화, 장관도 예외가 아니다

[라포르시안] 영국의 정책학자 길 월트는 장관에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주장했다. 최소주의자, 정책선택자, 정책집행자, 정책 대사 중 하나라는 것(길 월트 지음, 김창엽 옮김, <건강정책의 이해>, 한울 펴냄).

“최소주의자는 부처의 기본 역할만 수행한다. 정책선택자는 똑똑한 일반인처럼 행동하면서 여러 정책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정도에 만족한다. 정책집행자는 관리자로서 해야 할 역할과 효율성에 모든 관심을 쏟고, 정책 대사는 일반대중과 만나 부처의 정책과 업무를 홍보하는 것을 주로 한다.”

더 중요한 내용이 이어진다. “공무원이 정보를 장악해 장관을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은 다음,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가?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 대통령을 뽑느라 장관(그리고 책임이 있는 고위 공직자)을 소홀하게 생각하기 쉽다. 장관은 생각보다(생각만큼!) 중요하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두 달이 넘었지만 행정부 구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사청문회를 거쳐 이미 활동을 시작한 장관이 있는가 하면, 이제야 지명된 장관도 있다. 장관 이외에 책임 있는 공직자까지 포함하면 한참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좋은 정부를 가질 수 있다면 시간이 좀 더 걸린다고 무슨 큰 문제일까. 충분히 시간을 쓰는 것이 검증과 판단에 도움이 될 터이니 기다려도 된다. 행정부가 해야 할 정책과 사업의 방향을 논의하고 명확히 하는 기회가 되면 금상첨화다. 

시간과 속도, 행정부 구성의 완결 여부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관심은 고위 공직자의 충원 구조에 대한 것이다. 위장 전입인지 아닌지, 제대로 인사 검증을 했느니 못했느니, 그 미시적 조건과 과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무슨 기준으로 뽑고 판단해야 하는지를 묻고자 한다.     

고위 공직을 임명하는 일이 ‘전공(戰功)’을 보상하거나 권력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어떤 사람을 찾고 어떤 이를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는 거간꾼으로 ‘동원’해야 할까? 이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표적 고위 공직자인 장관을 예로 든다(다른 공직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정치와 정책을 소비하는 입장에서, 외부자로, 얼른 보기에도 장관은 성격이 서로 다른 삼중, 사중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선 행정 관료로서의 기능. 행정부에 속해 정책을 만들고 집행해야 하면, 장관은 전문적 경험과 지식, 기술을 가지고 이를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의미로든 정책과 행정의 전문가여야 한다.

한때 머리를 빌리면 된다는 이도 있었지만, 모든 중요한 판단을 직업 관료에게 맡기면 다른 역할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바이오나 정보 기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 제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 그 말에 무슨 권위가 따를 수 있겠는가?  

정치적 역할도 중요하다. 대통령이 기초연금 인상과 아동 수당 도입 등을 약속했으니, 주무 부처 보건복지부의 장관은 반대하는 사람을 설득하고 여론과 국회의 지지를 이끌어 내야 한다. 예산 부처와의 지루한 줄다리기에도 보건복지부 장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혼자 하는 일은 아니나, ‘가치 있는 것’의 배분을 둘러싼 갈등과 싸움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피할 수 없다.

크게 보면 정치적이라 할, ‘옹호자’의 역할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아직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둘러싼 논란이 끝나지 않았지만, 우리 정치체제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을 제대로 관리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상대적 약자와 불리한 집단·계층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은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장관에게 옹호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역설이자 비참이지만, 그보다는 가능성을 묻는 편이 빠르고 편하다. 솔직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것이다. 관료제적 합리성이든 지식의 힘이든, 또는 ‘나라 만들기’의 사명감이든 출발과 동기는 상관하지 않는다. 대표성을 장담할 수 없는 제도 정치, 자기 이해에 매몰된 굳은 관료체제, 사회적 권력을 확보하지 못한 사회 권력의 삼중고에 틈을 내주길 기대한다.     

장관은 또한 조직 관리자이자 경영자다. 적게는 몇 백 명부터 많게는 몇 천(간접적으로 몇 만, 몇 십만)에 이르는 공무원과 직원, 관련자를 움직여야 한다. 훈련과 경험 없이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다.

현재의 공직자 충원 구조로 이런 삼중, 사중의 조건을 갖춘 적격자를 충원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할까? 안타깝지만 현실은 사람을 ‘키우는’ 것은 고사하고 누가 그런 사람인지 판단할 수도 없다.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조건 중 한 가지쯤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나, 갑자기(!) 돌출한 교수나 전문가를 두고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알기 어렵다(정치인과 관료도 자질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인사청문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턱없이 모자란다. 현재 시스템으로 적격자를 찾고 선택하는 것은 운에 맡겨야 한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늦었다. 인사청문회를 아무리 고쳐 봐야 금방 좋아질 가능성도 별로 없다. 아예 틀을 바꾸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면 조금 나아질지 모르는 것은, 적격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기르는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어서다. 

어떤 정당의 학생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지역구 의원이 되고, 이들은 야당 ‘새도우 캐비넷’의 장관이나 차관으로 10년 넘게 (간접적으로) 국정에 참여한다. 굳이 적격자를 찾을 필요가 없으니, 30대 초반에 장관을 해도 경험이 적다고 탓하기 어렵다.   

현실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틈에 정치와 정책은 얼마든지 비틀어질 수 있는 것을 걱정한다. 지난 정권의 블랙 리스트 사건이 가까운 교훈이다. 연금과 메르스 사태의 관리나 뒤처리 등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가 가진 정치적 권력은 작고 관료적 권력은 지나치게 크다(그리고 촘촘하다!). 대통령이 알고 관심을 가진 일에서는 사무관이 가질 만한 힘도 행사하지 못하지만, 눈에서 벗어난 일은 봉건 영주와 같은 권력을 가진다. 미시적이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결정에서는 때로 전횡도 서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시콜콜한, 그러나 개인에게는 중요한 인사 문제. 꼭 대통령 중심제 탓이라 할 수는 없지만, 전근대적 권력 구조임에 틀림없다.

장관을 제대로 선택했나를 생각하면서, 이들에게 기대를 걸기보다 어떻게 감독하고 ‘통제’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가지고 행사하는 권력에 비해 민주적 책임성이 약한 국가 체제가 행정부라면, 그중에서도 장관은 더욱 정치적, 행정적, 사회적 통제의 공백 상태에 있기 쉽다. 특히 사회적으로는,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는지, 잘 하는지 못하는지, 알고 판단할 방법이 별로 없다.

문제는 분명한 데 비해 할 수 있는 일은 적다. 민주적, 사회적 통제가 필요한 것은 의심할 수 없지만, 어떤 방법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이디어가 있다고 바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정부와 국가체계가 바뀌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사회적으로 민주주의가 더 넓고 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도 큰 도전이다.

구체적 수단과 방법을 마련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몇 가지 수단(예를 들어 투표나 주민 소환, 탄핵 등)이 있을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토대를 강화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여러 당사자의 준비도 충분치 않다.   
              
한 가지 잠정적인 방법. 모든 수준과 모든 영역에서 ‘시민 참여’를 강화할 것을 제안한다. 참여는 두 가지 흐름이 만나서 상승효과를 내야 하는데, 하나는 시민이 더 강하게 요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를 수용할 제도와 장치를 확대, 강화하는 것이다.

전통적 ‘위원회’와 ‘자문’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민이 실질과 내용을 간섭할 수 있어야 하고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장관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촘촘해야 하고, 참여하면 결과가 바뀌어 시민 참여의 ‘효능’이 나타날 정도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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