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뷰] 저부담-저급여-저수가 '1977년 패러다임' 여전히 지배...단기속성 '전국민건강보험' 부작용 심각

1977년 7월 1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국민의료보험제' 시행 관련 기사.
1977년 7월 1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국민의료보험제' 시행 관련 기사.

[라포르시안] 오는 7월이면 우리나라에 건강보험제도가 도입된 지 40주년을 맞는다.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는 보건의료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7년 7월부터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이래 엄청난 외적 팽창을 거듭했다. 

의료보험을 도입한 지 12년 만인 1989년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완성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긴 힘들만큼 짧은 기간에 이룩한 성과다.

속도만 빨랐던 게 아니다. 의료의 질적인 면에서도 눈부신 성장을 했다. OECD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의료비를 지출하면서도 건강지표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OECD 헬스데이터 2015'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의사에게 외래진료를 받는 횟수는 13.2회(6.7회)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많고, 환자 1인당 병원평균재원일수는 16.4일(8.0일)로 OECD 평균보다 2배 더 길다.

건강상태를 나타내는 지표 중에서 출생시 기대수명은 81.8세로 OECD 평균(80.5세)를 뛰어 넘었고, 영아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3.0명으로 OECD 평균(4.1명)보다 더 낮다. 암과 심뇌혈관질환에 의한 사망률은 OECD 평균과 비슷하거나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선진국이 보건의료 분야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한 성과를 우리는 단 수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완성한 셈이다.

하지만 빠르다고 다 좋은 건 아니었다. 한국경제는 60년대 이후 압축적 산업화를 거치면서 소득 양극화와 실적주의와 편법의 성행, 취약한 복지, 불평등한 경쟁체제 등 갖가지 부작용을 뒤늦게 겪고 있다.  

40년 만에 압축성장을 거듭한 한국의 건강보험에서 이런 부작용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이미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의료이용의 양극화와 지역간 의료자원의 불균형, 인구 고령화와 의료기술 발전에 따른 의료비 급증, 비효율적 의료공급 및 이용체계, 그리고 시한폭탄을 떠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건강보험제도의 난맥상 등이 서서히 한국의료의 목을 죄고 있다. 벌써부터 의료시스템 곳곳에서 붕괴 조짐을 보인다.

가장 심각한 건 의료전달체계의 부재다. 

동네의원은 1차 의료기관으로서 게이트키퍼 역할을 상실한지 오래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보는 '박리다매 진료'와 비만과 성형 등의 비급여 진료에 매달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태에 놓였다. 

대학병원은 끊임없이 병상을 확충하면서 몸집을 부풀리는 식의 성장을 지속해 왔다.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동네의원과 감기환자 유치 경쟁까지 벌여야 하는 궁색한 처지로 내몰렸다. 병상수가 곧 경쟁력이 되는 특수한 의료환경 탓에 병상수 확충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병원의 몸집 부풀리기 경쟁과 의료자원의 수급 불균형 속에서 환자안전을 위한 적정 의료인력 확보와 안전시스템 구축은 항상 '후순위'였다. 

왜 이렇게 됐을까. 조급증 때문이었다. '전국민 건강보험 달성'이라는 압축성장의 신화에 매몰된 탓이다. 

1977년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면서 당시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보험료 납입 저항을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완성해야 한다는 속도전을 벌였다. 그러다 보니 보험료는 적게 내고, 보장성은 낮게, 의료수가도 낮게 지급하는 '저부담-저급여-저수가'의 3저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3저 시스템은 의료공급체계에서 수많은 문제를 낳았다. 3저 시스템 속에서 병원의 몸집 풀리기와 시설 경쟁 속에서 환자안전을 위한 적정 의료인력 확보와 안전시스템 구축은 언감생심이었다. 

더욱이 정부는 지난 40년 간 의료공급자원 확충의 대부분을 민간에 맡겨 놓은 채 공공의료 확충을 등한시했다. 병원부터 의료인력, 의료시설까지 모든 의료자원이 민간의 경영논리에 따라 확충이 이뤄졌다. 

그런 탓에 의료자원의 지역간 불균형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상황이 심각하지만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공공의료 비중이 워낙 미약한 탓에 민간이 주도하는 의료시장의 문제를 조정할 수 있는 보건의료 정책을 펴기 힘든 상태에 빠졌다.

전국민 의료보험제 도입을 보도한 1989년 7월 1일자 한겨레 기사.
전국민 의료보험제 도입을 보도한 1989년 7월 1일자 한겨레 기사.

3저 시스템은 단기속성으로 의료보험제도의 외형적 틀을 갖추게 했을진 몰라도, 사회보험으로써 의료보장이라는 본질적 기능은 취약한 구조를 갖게 했다.

급성기질환에 대한 의료이용 접근성과 의료비 보장은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질병의 예방이나 재활, 건강증진에 관한 보험급여는 크게 취약하다. 건강보험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장성이 낮다보니 중증질환으로 인한 '재난적 의료비'는 여전히 국민들의 삶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빠지게 만들 만큼 위협적이다.

'상병수당' 제도마저 없다보니 큰 병에 걸리면 곧바로 소득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의료이용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취약한 의료보장으로 인해 건강 불평등이 소득양극화를 가속화 하는 지렛대로 작용한다.

의료서비스 공급자들의 사정도 별반 다를게 없다. 의료기관은  저수가체제를 기반으로 한 행위별수가제 속에서 짧은 시간에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해 진료하느라 허덕인다. 수도권의 대형병원으로 의료자원이 몰리고, 지방의 의료인프라는 점점 황폐해 지고 있다. 그 속에서 과잉·중복투자와 불필요한 의료이용을 유도해 환자 부담을 높이는 의료생태계가 고착화 되고 있다.

이대로는 건강보험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이미 그런 징조가 곳곳에서 보인다. 지속가능한 건강보험을 위해 가장 먼저 저부담-저보장-저수가로 상징되는 '1977년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 세계에서 최단기로 전 국민 건강보험 가입을 달성했다는 '압축성장 신화'를 깨야 한다.

건강보험제도의 개혁이 절실하다. 다만 개혁의 방향을 건강보험으로 한정해선 답이 없다. 상병수당 도입처럼 건강보장 뿐만 아니라 노동, 경제, 사회, 문화를 두루 살핀 의료보장체계가 필요하다.

건강보험 개혁과 동시에 의료계도 노동환경 개선과 소득양극화와 건강형평성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열악한 노동환경이 개선되고, 소득분배의 형평성이 개선될 때 ‘적정 부담-적정 급여-적정 수가’로의 선순환 구조로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