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동료 여러분, 향후 우리들의 업무는 다음의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일을 올바른 장소에서 행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올바른 일을 올바른 방법으로 행해야 합니다."

지난 2003년 7월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구 수장에 오른 고(故)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그해 7월 21일 WHO 직원을 대상으호 한 연설에서 이렇게 당부했다. 이 전 사무총장은 WHO가 밀실행정과 관료주의에 빠져 제구실을 못한다고 비판했다. WHO 수장을 맡으면서 조직 혁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올바른 일을,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하는 게 바로 그가 생각한 WHO 개혁의 기조였다. 그는 그 원칙대로 실행에 옮겼다.

지난 3월 10일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나왔다. 비로소 수개월 간, 아니 지난 4년간 지속해온 국정농단 사태가 일단락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오는 5월 9일 제19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치러진다. 벌써부터 각 정당의 대선주자들이 표심을 잡기 위한 공약 경쟁이 뜨겁다. 보건의료 분야 공약도 쏟아진다. 지금까지 주요 후보들이 발표한 보건의료 공약은 공공의료 강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18세 이하 무상의료, 주치의 제도 도입 등으로 과거 대선이나 총선에서 나왔던 공약의 재활용 수준이다. 물론 이런 공약이 여전히 필요한 상황인 건 맞다. 보건의료 부문에서 기존에 없던 혁신적인 공약을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특정 후보의 대선캠프에 참여하는 인사로부터 "이번 대선에서 새롭게 주목할 만한 보건의료 공약을 찾기 힘들다"는 하소연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에서 보건의료 공약으로 적극 추천하고 싶은 게 있다. '민주적인 보건의료정책 거버넌스 구축'이다. 앞서 이종욱 전 사무총장이 했던 말처럼 '올바른 일을,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보건의료정책 거버넌스를 구조화 해야 한다는 거다. 거버넌스란 어떤 일을 실행하는 과정에서의 의사결정 시스템이고, 또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 그 자체다. 그동안 한국의 보건의료정책 결정 시스템이나 의사결정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관료주의적이란 지적을 받아왔다. 이는 거버넌스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회의 모습.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회의 모습.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라는 정책만 놓고 보자. 역대 정부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앞세우지 않은 때가 없다. 그런데도 건강보험 보장률 수치는 참여정부 이후 10년 째 60% 중반을 헤매고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에 크게 못 미친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4대 중증질환 강화를 추진했지만 전체적인 보장률 수치는 되레 낮아졌다. 건강보험 가입자들은 의료비 부담이 크게 낮아졌다고 체감하지 못한다. 왜 이런 걸까.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절차적 정의'와 '의사결정의 정당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대선이나 총선에서 표를 얻기 위해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한다. 때로는 보장률을 '00%'까지 확대하겠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한다. 제시한 보장률 수치를 달성하기 위해 급여 확대를 추진한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의료전문가나 환자들의 의견수렴도 없이 불요불급한 항목의 급여 적용이나 엉뚱한 방식으로 급여 확대가 이뤄진다. 결국 보장성 확대를 위해 수천억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하지만 효과는 없다. 심지어 질환별로, 병원 종별로 건강보험 보장성의 왜곡과 형평성 문제까지 초래하고 있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가 추구해야 할 '국민의 건강권 보장'이란 본래 목적이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보장성 강화 방안의 결정이 정부가 운영하는 무슨 무슨 위원회를 통해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결정되면서 '건강보험 재정안정화'란 틀에 끼워 맞춰 변질됐기 때문이다. 보건의료정책 거버넌스의 철저한 부재로 빚어진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의료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거버넌스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 올바른 거버넌스 구축의 필요성을 반증하는 게 바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다. 국민건강보험법에 근거를 두고 보건복지부에 설치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는 보험료와 의료수가 조정부터 요양급여 및 건강보험제도 개선사항 등을 심의·의결하는 기구다. 의료서비스 공급자 대표와 가입자 대표, 공익대표가 '8:8:8' 동수로 참여해 상정된 안건을 다수결로 결정하는 구조다. 그러나 공급자와 가입자들은 건정심이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라고 여기지 않는다. 가입자, 공익대표 등의 선정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는 '블랙리스트'를 통해 정부 산하 위원회의 위원 구성에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건정심도 예외는 아니었다. 복지부 산하 수많은 위원회의 운영이 크게 다를 바 없다. 관료주의적 보건의료정책 결정 구조다. 보건의료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이나 과정 자체가 상당히 취약함을 보여준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정부 주도의 통제와 관리에서 탈피해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주체적으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그런 경로를 통해 보건의료정책 결정이 이뤄지게끔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와 시민사회, 보건의료 전문가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에 기반한 정책 결정 거버넌스를 구조화 해야 한다. 올바른 방법과 경로를 통해 의사결정 과정 자체의 정의와 공정성, 합리성을 갖출 수 있도록 거버넌스를 형성하고 내재화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공공의료 강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의료전달체계 개선 등의 정책이 본래 목표한 바를 달성할 수 있다. 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관료적 통제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당장은 민주적인 거버넌스의 개념이나 방법이 뜬구름 잡는 주장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보건의료정책의 거버넌스 구축 필요성과 방법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앞서부터 보건의료정책 거버넌스 개혁에 대한 요구도 많았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출범한 ‘보건의료개혁국민연대’는 시민과 전문가가 연대해 참여하는 보건의료정책 거버넌스 구축을 개혁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러기에 이번 대선에서 '민주적인 보건의료정책 거버넌스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놓기를 기대한다. 이를 요구해온 많은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참여와 연대로 기꺼이 힘을 보탤 것이다. 보건의료정책에서 이해당사자의 의사결정 접근성을 높이고, 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거버넌스를 모색하는 정부가 출범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사결정 과정은 안단테로, 결정된 정책의 실천은 알레그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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