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로버트 노직 지음 / 김한영 옮김 / 김영사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로버트 노직교수의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Book소리에서 소개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생각들이 오갔습니다. 우선 든 의문은 정말 소크라테스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하는 마지막 질문을 남겼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자가 그 점에 관하여 따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문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가 구분한 스물여섯 가지의 주제가 가치 있는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도 의문에 포함됩니다.

애나 로버트슨 브라운은 1893년에 쓴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What is worth while?>라는 제목의 책에서 “단 한 번의 삶이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Only one life to live! We all want to do our best with it.)”라고 서두를 떼고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로버트 노직 교수의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로 돌아와 보았더니 이 책의 원제는 <The Examined Life>입니다. ‘성찰하는 삶’으로 번역될 수 있는 제목은 아마도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서 출발한 저자의 사변(思辨)을 나타내기 위한 제목으로 보입니다. 이 책의 제목을 정할 때, 비록 37쪽에 불과한 책이지만 애나 로버트슨 브라운의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와 헷갈리게 할 수도 있겠다는 고민을 해보았더라면 좋았겠습니다.

다시 ‘성찰하는 삶’으로 돌아가서 노직 교수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가혹’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삶에 대한 성찰은 당신이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고, 그럼으로써 당신을 완전히 구현한다. 다른 사람이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 결론과 잘 어울리고 결론에 도달한 사람이 어떤지를 보지 않고서는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11쪽)”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정도는 되어야 누군가의 삶에 대한 성찰에 대하여 논할 수 있겠다’, 뭐 이런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꼽히는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기원전 469년 – 기원전 399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그 무렵 아테네는 몰락 중으로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신과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진보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정신이 힘을 얻어 격돌하던 시기였습니다. 자연과학에 관심을 두었던 소크라테스는 당시 그리스 철학의 이론체계가 자의적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고 ‘사실’에 관한 ‘명제’를 고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 제자 카이레폰은 델포이 신전에 가서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하고 아폴로 신에게 물었고, 신전의 무녀는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라는 신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스스로는 무지하다고 생각해오던 소크라테스였기에 현명하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 참된 지혜를 아는 척했지만,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신전에 새겨진 ‘Gnothi Seauton(너를 알라)’을 외고 다녔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고, 이 때문에 ‘가장 현명한 아테네인’이라는 신탁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다음백과의 내용을 요약함)

플라톤 이후로 철학적 전통은 도덕적 행동이 우리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노력해왔다고 전제한 노직교수는 그러기 위하여 먼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이해해야 하고, 그에 의거하여 도덕적 행동의 역할과 중요성을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을 숙고하려는 시점에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내가 이해하는 것이 전부라고 고백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어떤 입장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온전한 인간 존재만이 관심의 대상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또한 ‘2차적 묘사에 기초하여 광범위한 왜곡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저자는 “어떤 독자도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이 책에서 슬로건이나 표어를 끌어내 제시하지 말고, 어떤 학교도 여기에 담긴 내용에 대해 시험을 치지 말 것(406쪽)”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ook소리에서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생각을 인용하고, 요약하기로 하였습니다. 책이 되었건 글이 되었건 쓴 이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는 읽는 이의 뜻에 따라 해석되거나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우려하였다면 글을 쓰거나 책을 내지 말았어야 할 것입니다.

작가 소개가 늦었습니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교수는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논쟁적인 사상가로 손꼽히는 미국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입니다. 컬럼비아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대학원 시절 ‘소크라테스적 논변’으로 기존의 철학적 입장을 논파하여, 천재 철학자로 주목받았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적 난제(Socratic Puzzles)>는 그의 대표적 저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이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것은 그가 글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이론 등은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데, 플라톤의 <대화편>과 크세노폰의 <회고록 Memorabilia>이 주요한 출처입니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저자는 ‘죽음’이라는 화두로 시작한 이야기를 ‘어느 젊은 철학자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26개의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죽음’, ‘부모와 자식’, ‘창조’, ‘신의 본질, 믿음의 본질’, ‘일상의 신성함’, ‘성’, ‘사랑의 유대’, ‘감정’, ‘행복’, ‘초점’, ‘더 진실한 존재’, ‘무아’, ‘태도’, ‘가치와 의미’, ‘중요성과 무게’, ‘실재의 행렬’, ‘어둠과 빛’, ‘신학적 설명들’, ‘홀로코스트’, ‘깨달음’, ‘모든 것의 정당한 몫’, ‘철학자가 사랑하는 지혜’, ‘이상과 현실’, ‘지그재그 정치학’, ‘철학의 생명’, 그리고 ‘어느 철학자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각장의 주제는 독립적인 듯 보이지만, 내용을 보면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의 장을 떼어서 따로 읽어도 충분히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로 ‘가치 있는 삶’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본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논의함이 전혀 생뚱맞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죽기를 꺼리는지는 그가 이루지 못하고 남긴 것에, 그리고 일할 수 있는 여분의 능력에 좌우된다.(24쪽)’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노화는 일할 능력을 줄여 죽는 순간에 느끼는 후회의 양을 감소시킨다,’라고 설명합니다. 꿈꾸었던 것을 모두 이룬 다음에도 힘이 남아돌아간다면 새로운 꿈을 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 삶은 불멸을 꿈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멸을 꿈꾸는 사람은 특히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존재가 소멸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소멸은 음울하지만 불멸도 어두운 상상과 곧잘 어울린다.’라는 저자의 설명이 쉽게 와 닿는 것은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도깨비>에서 잘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어지는 주제 ‘부모와 자식’에서 ‘죽음’ 이후의 삶의 의미를 조금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야망을 충족시키는 존재로 자식을 인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자식을 통하여 자신의 삶 혹은 정신을 후세에 전할 수 있다면 이는 다른 의미의 불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후손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부(富) 이외에도 정신적인 것도 될 수도 있습니다.

‘일상의 신성함’이라는 주제는 삶에 집중하고 주의하는 신실한 마음가짐을 논합니다. 먹고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을 신성하게 여길 때 우리는 세계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우리의 탐구, 대응, 관계, 창조활동을 무한히 받아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제 ‘성’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설명하고, 다음 주제 ‘사랑의 유대’로 발전시켜나갑니다. 사랑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안녕을 추구하는 심리적 행위입니다. 폐쇄적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개인적 자아를 우리라는 개방적인 속성으로 전환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낭만적인 우리를 이루고 나면 서로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다는 심리가 생길 수 있지만, 각자는 상대방에게 독립적이고 당당한 개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이면서도 개인적 존재를 인정해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열린 관계에서는 감정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는데, 감정은 믿음, 평가 그리고 느낌이라는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아홉 번째 주제는 ‘행복’입니다.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삶에서 ‘행복’이 중요하지만, 유일한 것이 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삶의 서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전반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하여 얼마간의 행복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여러 개별 감정이 행복이란 이름으로 포장되곤 하지만 어떤 것은 감정이라기보다 기분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행복감정을 첫째, 어떤 것이 사실이어서 행복한 상태, 둘째, 지금의 삶이 좋다는 느낌, 셋째, 전체적 삶에 대한 만족 등의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각각의 행복감정은 믿음, 긍정적 평가, 그리고 느낌이라는 3중 구조를 보이지만, 믿음과 평가의 대상이 각기 다르고, 느낌의 성격까지도 다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열한 번째 주제 ‘더 진실한 존재’에서는 어떻게 참된 자신을 만날 수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참된 자신이라 함은 행복이나 쾌락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도달해야 하는 궁극적인 상태를 이르는 실재(實在)를 말합니다. 실재는 가치, 미, 생생함, 초점, 통합을 포괄하는 보편적 개념인데, 다양한 차원의 많은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재를 높이와 깊이의 방향으로 발전시키면  우리의 삶이 이상과 이해와 깊은 감정을 갖추게 되고 그것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열두  번째 주제 ‘무아’에서는 실재를 구현하기 위한 다른 경로를 설명합니다.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자아를 버림으로써 실재를 얻게 된다는 역설적인 설명입니다. 열네 번째 주제 ‘가치와 의미’에서는 실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열일곱 번째 주제 ‘어둠과 빛’에서는 실재의 발전이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파합니다. 때로는 고통스럽거나 비도덕적 방향을 가진 차원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부정적인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비극과 고통이 상황을 완전히 압도하거나 파괴하지 않는다면 더 큰 실재로 가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존중의 윤리, 대응성의 윤리, 배려의 윤리, 빛의 윤리라는 윤리의 네 층으로 이 부분을 설명합니다. 실재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차원이 등장하더라도 최소 훼손의 원칙으로 묶여 있는 존중과 대응성이라는 윤리의 두 층이 이를 제한하기 마련이고, 이어진 배려의 윤리는 보살핌과 관심으로부터 친절함, 더 깊은 자비, 사랑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으로 실재의 차원을 끌어올리게 됩니다. 빛의 윤리는 실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도록 하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스무 번째 주제인 ‘깨달음’은 역시 동양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만, 삶의 아픔과 고통을 줄여주는 경험적 사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재의 최고 목표를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성찰하는 삶’에 대한 철학적 사변에 더하여 개개인들이 다양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정치원리를 설명한다거나 새로운 목표를 향해 이성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로서의 철학의 역할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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