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뷰] 환자에겐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의료환경…환자단체 운동으로 많은 변화

[라포르시안]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환자는 '문 앞을 서성이는 낯선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때로는 야만인처럼 고함치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누군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줬기 때문이다.

환자는 보건의료 정책이나 의료환경의 변화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목소리로 최소한의 의견만 전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최근 들어 국내 보건의료 관련 정책에서 '환자운동', 혹은 '환자단체 활동'의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의료전문가나 정책 입안자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대등한 목소리를 낸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낸 게 바로 환자단체 운동이다.

“우리를 제외하고 우리에 관해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Nothing About Us, Without Us)

환자를 배제한 채 환자에 관한 어떤 정책도 결정해선 안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2000년대 초, 백혈병 환자들의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을 계기로 환자들이 당사자로 목소리를 내면서 국내 환자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환자를 배제한 채 환자에 관한 어떤 정책도 결정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움트기 시작했다.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의 산물로 '한국백혈병환우회'가 창립됐다. 그리고 지난 2010년 10월 백혈병환우회 등의 단체가 연대해 '한국환자단체연합회'를 출범했다.

환자단체 출범을 계기로 보건의료 제도나 의료시스템 안에서 '피동적인 수혜자'에 머물던 환자의 위치를 주도적인 당사자로 바꾸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실제로 환자단체연합 주도로 의료사고 피해자의 이름을 딴 법을 제정하고, 의료정책과 제도에서 많은 변화를 이끌어 냈다.

환자단체연합이 지난 2012년 6월부터 시작한 환자샤우팅카페가 대표적이다. 환자와 그 가족이 직접 참여해 의료서비스 현장에서 겪은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고, 전문가들과 함께 그에 따른 해결책도 함께 모색했다.

환자샤우팅카페를 통해 항암제 투약 오류로 목숨을 잃은 9살 종현이의 사연이 널리 알려지고, 이를 통해 의료기관 내에서 환자안전을 위한 관련법 제정 여론이 조성됐다.

환자단체의 지속적인 법제정 운동을 통해 2014년 12월 말 환자안전을 위한 의료기관의 책임과 의무를 명확하게 규정한 '환자안전법(일명 종현이법)'이 제정돼 작년 7월 말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조정 개시 대상을 ‘사망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상해’로 규정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일명 예강이법)도 만들었다.

환자단체연합은 또 지난 7년 간 ▲보호자 없는 병원 만들기 운동 ▲호스피스 완화의료 환경조성 운동 ▲합리적 의료기관평가인증제도 도입 등의 다양한 제도개선 활동도 펼쳐 성과를 냈다. 

그러나 의료사고 피해자의 이름을 딴 법이 만들어지고, 환자들이 감당하기 힘든 치료비와 약값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야만 하는 상황 그 자체는 불행한 일이다. 의료사고 피해자나 가족이 억울함을 소명하기 위해 스스로 의학과 법학을 공부해야 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다.

환자에겐 국내 의료환경이 한 쪽 골대 방향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환자가 서 있는 쪽으로 기울어진 불리하고, 불평등한 구조다. 환자단체연합의 지난 7년 간의 활동은 그런 구조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난 2월 2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창립 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지난 2월 2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창립 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지난 2일 서울여성플라자에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창립 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기념식은 환자단체연합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기념식 자리에 정치권을 비롯해 보건의료 관련 기관과 단체 등에서 200여명 넘게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국회의원이 직접 참석하고 보건복지부 고위공무원이 참석해 장관의 축사를 대독했다.

환자단체연합 안기종 대표는 "환자가 목소리를 내고 전문가가 함께 한다면 제도와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환자단체연합은 이날 '환자가 원하는 7대 보건의료정책'도 발표했다.

환자가 원하는 7대 보건의료정책은 ▲환자의 의료비 부담이 연간 100만원을 넘지 않도록 건강보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강화 ▲의료극빈자를 양산하는 재난적 의료비 해결을 위한 저소득층 의료비 안전망 구축 ▲중증질환으로 소득활동이 중단된 가정의 가계 파탄을 막기 위한 '건강보험 상병수당 제도' 도입 ▲환자의 투병, 사회복지, 정서적 지지, 사회복귀 등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환자투병지원센터' 운영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다빈도 의료민원의 재발을 방지하는 '환자권리센터' 운영 ▲동네의원 의사는 환자의 질병 치료와 예방, 만성질환 관리, 종합적 건강 상담까지 해주는 네비케이터 역할을 하는 일차의료 전문가 역할 정립 ▲환자가 최상의 질병 치료를 위해 최적의 의료기관과 의료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의료정보 통합제공 시스템 구축' 등이다.

환자단체연합은 이러한 보건의료정책이 향후 대선 정국에서 주요한 보건의료 공약으로 채택될 수 있도록 노력할 방침이다.

이런 노력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환자가 오롯이 자신의 아픔과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의료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 환자와 그 가족이 자신의 억울함을 소명하기 위해 의학과 법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고, 의료사고 피해자의 이름을 딴 법을 만들기 위해 거리로 나설 필요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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