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세계의 만남 / 제리 벤틀리 지음 / 김병화 옮김 / 학고재 펴냄, 2006년

[라포르시안] 지난 연말에 모 학회의 송년 임원회의에 초대를 받아 여행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다녀온 해외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해오던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앙코르와트, 이베리아반도, 아나톨리아반도, 발칸반도,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동유럽까지 모두 여섯 차례의 해외여행 가운데 제일 심혈을 기울여 여행기를 썼던 이베리아반도 여행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문명의 충돌에 두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이 충돌한 현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은 711년, 지금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던 우마이야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아랍인과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연합군을 이끌고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이래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왕과 카스티야의 이사벨여왕의 기독교 연합군이 그라나다를 함락할 때까지 무려 781년 동안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협력과 충돌을 반복하면서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를 돌아보면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세력들이 남긴 찬란한 유물과 그 안에 숨겨둔 놀라운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여행경험은 문명의 충돌현장을 찾는 여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문명의 충돌현장은 종교적 배경이 서로 다른 문명의 세력다툼으로 변질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소개하는 제리 벤틀리 교수의 <고대 세계의 만남>은 ‘교류사로 읽는 문명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종교가 다른 문명이 만났을 때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하와이 대학의 역사학과에 재직하면서, 역사적인 문화 간의 상호 영향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만, 문명 간의 교류는 어느 시기부터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세계의 만남>에서는 근대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문화 간의 만남의 역동적인 모습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로 다른 문명 출신의 사람들이 만날 때 일어나는 문화적 효과에 주목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사실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접촉하면서 갈등을 빚고, 타협을 하며 때로는 개종을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때 개종을 촉발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강력한 지원 없이 종교적, 문화적 전통만으로는 타 문명에 속한 사람들의 개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앞선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문화전통들이 폭넓은 절충주의적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역시 타 문명에 속한 사람들의 개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절충주의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이질적인 문화 전통의 틀 속에 기성의 신념과 가치 및 관습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며, 그 과정에서 팽창주의적 전통도 외국 땅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합니다. 절충주의란 문화적 타협으로 나가는 대로(大路)라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의 만남>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장 ‘문명들의 조우’에서는 우선 만남을 정의합니다. 두 번째 장 ‘고대 실크로드의 세계’에서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 한제국으로부터 인도의 마우리아제국, 중동의 파르티아제국 그리고 서쪽 끝으로는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를 통하여 이동한 문명의 속성을 설명합니다. 세 번째 장 ‘선교사와 순례자의 세계사’에서는 서기 600년부터 1,000년까지를 배경으로 동쪽 끝으로는 당제국, 그리고 중동에서 북부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세력을 펼친 아랍제국, 그리고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한 비잔틴제국과 북유럽의 카롤링거왕조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문명의 속성을 설명합니다. 네 번째 장 ‘유목제국의 시대’에서는 서기 1,000년에서 1,350년까지 동쪽 끝으로는 원제국으로부터 차카타이한국, 일한국, 그리고 유럽 동부에 접근한 킵차크한국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들이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을 통합한 시기의 문명을 설명합니다. 마지막 장 ‘세계의 질서를 향하여’에서는 1,350년에서 1,500년에 이르기까지로 동쪽 끝에는 명제국이, 인도에는 무굴제국이, 중동에는 사파비드제국이 그리고 아나톨리아반도로부터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오스만제국이 차지하던 시절의 문명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라는 단어는 “한 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바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개종이라는 단어는 개인적 경험, 즉 개인 영혼이 나아갈 방향이 재정립되는 것, 낡은 가치체계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체계로 전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와 옮긴이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신앙과 가치가 문화 간 경계선을 넘어가서 서로 다른 문명의 사람들에게서 충성심을 얻어 내고 생소한 문화 전통에서 개종자를 얻을 수 있었던 한계는 어디였을까?(17쪽)”라는 의문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즉 특정 집단에서 대규모적으로 발생한 개인들의 개종으로 새로운 문화 전통이 자리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개념을 확대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근대 이전에 사회적 맥락에서 일어난 문화 간의 개종을 분석해보면 자발적 제휴를 통한 개종,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압력에 의하여 유도된 개종, 동화를 통한 개종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자발적 제휴를 통한 개종이 성격을 구분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편인데, 대체로 근대 이전의 시기에는 문화적 경계선을 오가면서 장거리교역을 담당하던 상인들처럼 정치적․경제적․상업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자발적 제휴에 의한 개종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경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지만, 개인을 위협하지 않고도 조세나 재정지원, 혹은 신분 등에서 차별하거나, 종교행사의 참여를 제한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종교시설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문화의 경계를 넘어 신념과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절충주의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실크로드의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때 중국 토착의 도가사상을 비집고 들어가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불교는 도가의 용어와 사상을 마음대로 빌려 썼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부전이나 삼신각은 인도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토착신앙을 받아들임으로서 신도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교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기독교이지만 로마제국 초기에는 교세를 확대하기 위하여 이교도의 문화를 반영하였을 뿐 아니라 이교적 가치를 수용할 여지를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이교 영웅들의 특질을 기독교 성인들과 결합시키고 이교도 신을 기념하는 날을 기독교 축일로 정하여 이교의 전통을 흡수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입니다.
 
총론에 해당하는 문화간의 만남에 대한 설명에 이어 다룬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적 교류의 설명에서 주목할 점은 고대 실크로드시대에는 세 가지 차원에서 문화발전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차원은 중국, 인도, 근동, 지중해지역 등 유라시아 전역의 정착 농경문명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문명에 일관성을 부여할 신앙과 가치체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는 각각의 문명권에서 성장한 문화적 전통이 해당 지역의 국제도시에 유입된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에게는 대안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규모 개종이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문화적 교류를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차원은 상인들의 역할입니다. 문화권을 넘나드는 상인들은 자신의 토착문화전통을 이주한 도시로 가져옵니다. 그들이 가져온 문화적 전통이 이주도시의 엘리트층의 관심을 끌게 되면 개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각각의 시대를 통하여 명멸한 제국의 문명을 설명하는 가운데 기독교, 불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의 발전과 쇠퇴과정을 흥미롭습니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 인도는 브라만교 중심사회였는데,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에 머물던 사회가 교역과 상업중심사회로 변환이 되면서 도덕과 윤리적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불교가 사제계급이 주도하는 비교(秘敎)적 제례중심이던 브라만교를 대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브라만 사제들은 오직 자신들의 이익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상인들과 연대하여 호혜적 공생관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초기 불교의 교리는 단순하였지만, 오히려 다른 종교의 도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중반에는 아쇼카왕이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면서 불교는 폭발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불교가 상인들과 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크로드를 따라 다른 문명권으로 확산되는 기회도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중국에 자리잡기까지는 무려 50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유가와 도가의 전통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북부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자발적 개종이 시작되면서 중국사회에 불교가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3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동안 인도의 불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많은 인도의 승려들이 중앙아시아 국가나 중국으로 여행하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역으로 불교가 시작된 인도를 찾아 원천교리를 배우려는 승려들의 발길이 잦아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혜초스님이 인도를 방문하고 그 여행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11세기로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목제국들이 이슬람을 바탕으로 유라시아대륙을 석권하면서 이슬람교가 부상하고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인도에서도 불교가 탄생의 모태가 되었던 힌두교의 전통으로 흡수되면서 인도의 불교로부터 배울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이 점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에서도 당제국 시절 불교가 탄압을 받기도 했으며, 송왕조에 들어서 중국적인 문화전통이 살아나면서 불교의 세력도 퇴조하였습니다. 반면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크메르문명에서는 불교가 꽃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몽골제국에 이어 중동지역을 차지한 오스만제국이 아랍의 이슬람을 통치의 이념으로 삼으면서 이슬람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꾸준하게 확장을 하게 됩니다. 아랍지역은 물론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까지 중심종교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절충주의적 특징 때문에 토착 문화전통과 병행할 여지가 컸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기존의 문화적 전통이 완전히 소멸하고 새로운 전통이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적 대안들이 절충적으로 뒤섞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지역의 그림자극에는 힌두교의 서사시를 담고 있으면서, 시바와 비슈누에 바치는 주문이 알라에 대한 기도와 함께 읊기도 하는 것입니다.

15세기를 중심으로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5세기 동안의 발전과정을 토대로 예측해본다면 이슬람에 멀지 않은 미래에 세계를 주도하는 문화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5세기가 흐른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근대 이후 기독교국가의 적극적인 선교에 힘입어 기독교의 비중이 가장 크고, 이슬람이 뒤를 잇고 있으며, 인도대륙에 국한되어 있는 힌두교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불교는 그 세가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 간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좁혀져 종교적 특징 이외에 권역을 구분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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