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길이 만나는 곳 / 샐리 비커스 지음 / 강선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그리스신화는 다양한 형식의 유럽예술에 있어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시대에 맞추어 끊임없이 재해석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문화적 배경이 다른 탓인지 이해되지 않는 점도 많은 것 같습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로 이어지는 연작에서도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런 의문이 새로운 해석을 낳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 Book소리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설화를 바탕으로 재해석한 샐리 비커스의 소설 <세 길이 만나는 곳>을 소개합니다. 오이디푸스신화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이 생긴 책읽기였습니다. 언젠가 치매학회에서 재미있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커다란 검은 상자를 비추면서 과거에는 치매 전체가 비밀에 싸여있었는데, 많은 연구를 통하여 그 상자를 열었더니 여러 개의 작은 검은 상자가 들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치매에 관한 더 많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학동네의 세계신화총서의 하나로 소개된 <세 길이 만나는 곳>은 52세에 첫 작품을 발표한 영국의 늦깍이 작가 샐리 비커스의 소설입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분석심리학을 공부한 작가의 역량을 잘 살린 작품입니다. 책소개를 통하여 오이디푸스신화를 재해석한 이야기라고 알았던 것인데, 막상 첫머리에서 프로이트의 말년이 등장하여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왜 플로이드일까? 아마도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창시한 인연 때문인 듯합니다.

프로이트는 예순일곱이 되던 1923년 구강암을 진단받아 수술을 받았고, 이후 16년에 걸쳐 33번의 치료를 받았는데, 마지막에는 라듐치료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강암의 원인이 되었을 시가 피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강암 치료는 수술로 암을 잘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수술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환자가 시가를 계속 피운 탓인지 암이 계속 재발한 것을 보면, 림프절에 전이에 관한 기록이 없다고 하더라도 3기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구강암환자의 5년 생존율은 수술과 방사선치료법이 발전하였음에도 수십 년 동안 별로 개선되지 않아 50% 정도에 머물고 있는데, 3기가 41.3% 그리고 4기의 경우 26.5%에 불과한 것을 보면 프로이트는 장수한 셈입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도 소포클레스를 포함하여 다양한 재해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였지만,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고 테베로 입성하는 것까지만 전하는 신화도 있다고 합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아버지 라이오스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생겼습니다. 젊은 시절 라이오스는 피사의 펠롭스왕에게 의탁한 바 있는데,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에게 반하여 그를 테베로 데려왔습니다. 크리시포스가 자신의 구애를 거절하자 라이오스는 그를 목졸라 죽였고, 펠롭스는 라이로스를 저주하기를 ‘너는 네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한 것이 신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들이 지나치게 인간사에 개입했던 것 같은데 이 또한 인간의 염원이 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신전에서 신탁을 구하는 과정을 보면 알고자 하는 것을 적어 예물과 함께 신전에 바치면 피티아라고 하는 여사제가 신에게 물어 답을 얻었다고 합니다. 피티아는 월계수 아래 앉아서 신탁을 전하는데, 신이 접근하면 월계수의 이파리가 떨린다고 합니다. 문제는 필요한 경우에 조작이 가능하였고 당시 많은 사제들이 타락해 있어, 적당한 뇌물로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65쪽)

<세 길이 만나는 곳>은 프로이트가 구강암으로 처음 치료를 받던 1923년 4월 20일 빈의 병실로 찾아온 테이레시아스(델포이의 사제이며 오이디푸스 비극의 마지막 장면에 증인으로 나옵니다)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두 차례의 만남 이후에 15년을 건너 뛰어 1938년 9월 8일 런던의 한 병원에서 재회하면서 본격적으로 오이디푸스신화를 설명합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가운데 만남이 성사되는 것을 보면 꿈속이거나 환상 속의 만남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통하여 정신분석학을 틀을 세운 프로이트인 만큼 꿈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하여 작가는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요? 장례식 직전의 만남에서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적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현실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는 깜깜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생각할 것이 많을 것 같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그문트 프로이트

제목에 등장하는 ‘세 길’은 그리스 포키스 지방에 있는데, 테베로부터 오던 길이 파르나소스산 부근에서 두 길로 갈라지는 장소입니다. 한쪽은 델포이를 향하여 북서쪽으로 뻗는 가파른 골짜기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파르나소스 산의 기슭을 감싸며 다울리스의 비옥한 평원을 향해 동쪽으로 휘어진다고 합니다. 갈라진 길이 등장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납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길은 모두 같고, 모든 길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지나가지게 되는 것(46쪽)’이라고 테이레시아스는 전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숭배하는 신들이 때로는 무의미해 보이는 폭력도 서슴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부당한 일도 저지른다고 비난합니다. 반면 프로이트는 ‘신’이란 건 자연의 부당함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는 원시적 욕망이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 부분을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비해서 읽으면 잘못은 라이오스가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물론 그의 네 자녀까지 저주에 휘말려야 하는 것은 신의 부당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원시적 욕망으로 본 프로이트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태어나서 불과 3일 만에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품에서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와 메로페에 입양되어 성장하지만, 자신과 관련된 신탁을 듣고는 왕궁을 떠난 것을 보면 프로이트가 세운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이론이 기본부터 잘못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탁의 오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오이디푸스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가정환경과 그가 라이오스에게 신탁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테이레시아스는 폭력가정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정부를 끌어들인 후에 집을 떠나 델포이로 가서 사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외할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테베에 왔다가 델포이로 돌아가는 길에 델포이로 신탁을 구하러 가는 라이오스를 만나게 됩니다. 라이오스는 길을 걷는 테이레시아스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라이오스가 구한 “만일 내가 자식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83쪽)”라는 질문을 받은 것은 테이레시아스였습니다. 

순간 테이레시아스가 뇌리에 떠올린 것은 세 갈래길에서 만난 라이오스가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었습니다. 연상은 자연스럽게 폭력을 당한 젊은이가 지팡이를 빼앗아 마차에 탄 라이오스를 떨어뜨려 죽이는 장면으로 이어졌고, 그런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거라는 직감이 휘딱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이오스왕이여. 당신은 아들을 얻게 된다. 그리고 아들은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것이다.(84쪽)”라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신탁인 것처럼..... 피티아는 곁에 있었지만 격렬하게 떨리는 월계수가지를 손에 쥔 채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청년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신전을 찾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신탁을 구하는 장면도 적절하지 않은 모양새입니다. 즉 아폴론이 신전을 떠나고 없는 시기라서 피티아가 쉬는 날이었음에도 신탁을 구하려는 코린토스청년 즉 오이디푸스에게 답을 주지 않고 돌려보내려했던 것인데, 오이디푸스가 순응하지 않자 끔찍한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티아의 마지막 날이었다고 합니다. 피티아가 사라진 다음에 테이레시아스는 고향인 테베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다소 분명치 않은 듯합니다. 

라이오스가 델포이에 갔던 것은 아들에 관한 의문이 아니라 테베의 골치덩이가 되고 있는 스핑크스에 관한 답을 구하려했던 것으로 알고 있고 그에 관한 신탁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오이디푸스와 만나 죽임을 당했던 것인데, 신탁의 선후가 다소 모호한 것 같습니다. 

라이오스 사후에 집정관에 오른 이오카스테의 남동생 크레온은 스핑크스를 처치한 사람에게 테베의 왕위와 이오카스테와의 혼인시킨다고 공표합니다. 그런데 이오카스테는 남편 라이오스가 죽고 재혼을 하는 마당에서 아들과 재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확인해볼 생각은 왜 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그것도 네 자녀를 낳을 때까지 말입니다. 물론 생후 3일된 아들과 헤어졌으니 얼굴로 알아볼 수는 없었겠지만 신탁을 고려한다면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아니면 오히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결혼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오이디푸스에 관한 신탁이 내려진 이유가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살해한 것이었던 것을 보면, 라이오스는 미소년에게 더 관심이 많은 남색취향이었기 때문에 이오카스테는 그런 남편에게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라이오스가 임신을 기피했던 것은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이미 받아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오스를 취하게 한 다음에 관계를 맺어 오이디푸스를 낳은 이오카스테의 선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이오스가 아들 낳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테베의 왕위가 끊어질 위험에 처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탁의 위험을 알면서도 신에 도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오카스테는 신탁이 아폴론의 것이 아니라 사제로부터 들은 것이고 알고 있었고, 자식을 바라는 자신의 바람을 거부하려는 라이오스의 핑계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테베에 역병이 돌았을 때, 해결방안을 묻기 위하여 델포이에 신탁을 물으러 크레온을 보낸 이유도 의문입니다. 당연히 오이디푸스가 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델포이의 신탁이 그리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던 것이라면 특히 그렇습니다. 테이레시아스도 그 점을 지적합니다. 오이디푸스왕이 직접 신탁을 구했더라면 다른 해결책을 들었을 수도 있었고, 같은 해결책을 다르게 들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크레온이 가져온 신탁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테이레시아스 역시 오래 전에 해결된 일을 새삼스럽게 거론하는 것보다는 사태를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말하지만 이번에는 오이디푸스가 적극적으로 상황을 정리해나갑니다. 

자신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듣고 코린토스를 떠났던 것처럼, 오이디푸스는 참이 아닌 거짓은 받아들일 수 없는 순수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머니와 자고 싶거나 아비를 죽여야 할 욕망 같은 것은 애시 당초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불행은 알려고 하지 말아야 했던 진실을 알려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안락함보다는 진실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신과 델포이의 신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저의 오해가 풀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신탁에서 도망칠 수는 없지만 신탁과 함께 살아갈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탁이 완성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치명적인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요즈음 즐겨보고 있는 <쓸쓸하고 찬란하神(신)-도깨비>에서 신이 전하는 “운명은 내가 던진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갈라진 두 개의 길 가운데 하나를 고른 것이 아니라 갈라지기 전의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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