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누가 이 시대의 공인(公人)인가

[라포르시안] 박근혜 게이트를 다루는 국정조사 청문회.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보고 있기에 참으로 답답하고 분통 터지는 노릇이다. 시청하는 사람들 혈압이나 올릴 것이면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탄식이 줄을 잇는다. 여기서도 우리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니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다. 보통 사람들의 삶을 쥐고 흔드는 이른바 정치·경제·사회 ‘엘리트’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그리고 지식을 무기로 삼아 대중을 속였던 것이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라면, 오랜 신화에서 벗어나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셈이다.

그중에서도 오늘 우리의 관심은 ‘주범’과 ‘공동정범’이 아니다. 박근혜 게이트는 그들 말고도 수많은 정치인, 관료, 지식인, 언론이 한통속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부분 그런 줄 몰랐다고 하겠지만, 결코 모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힘을 보태면 안 된다는 것은 명확했던 것이므로, 그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그들의 민낯. 

서울대병원은 스스로 한국 최고 병원임을 자신하고 자부하는 곳이다. 그곳의 전, 현직 병원장 두 사람이 동시에 청문회에 출석했다. 평소 내세우던 것 그대로면, 그들은 한국 의료의 지침이 될 의학적 견해나 판단을 두고 다투었어야 한다. 국립대학병원 또는 ‘국가중앙병원’의 기능을 그리고 그 어려움을 국민에게 설득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비록 허울만이라도.

실제 우리가 봤던 것은 누가 누구를 소개했고 누구의 청탁을 들어 주었는지 같은, 무슨 사기 사건에 연루된 ‘브로커’ 스토리다. 그마저 서로 말이 다르고 남 탓을 계속했으니, 그냥 개인으로도 혀를 찰 정도로 천박하다. 이를 두고 누가 의사, 의학자, 국립대학병원의 경영자, 대통령 주치의를 떠올릴 수 있을까?

전통의 ‘명문’임을 자부하던 이화여대, 그곳 사람들은 또 어떤가. 교육부 감사에서도 드러난 부정을 뻔뻔하게 부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모양이 기가 막힌다. 학교를 찾는 학부모는 누구라도 만난다는 전임 총장의 한심한 변명에 할 말을 잃는다. 아니다, 그들의 참모습을 드러내기로 치면 차라리 잘한 짓인지도 모르겠다. 

‘비선’ 진료에 개입한 의사들에 대해서는 말하는 쪽이 더 민망할 지경이다. 의학적 판단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렇지 않게 불법까지 서슴지 않는 그 의식과 행동을 뭐라고 해야 할까. 이익 앞에는 그 어떤 의료윤리와 규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단지 영혼 없는 청부업자가 아닌가 싶다.                 

청문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다를 바 없는 사람들. 뒤에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공무원이다. 그 수많은 국정농단을 그들이 몰랐다고 하면 곤란하다.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공무원이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하지 말라. 뻔히 알면서 그들은 불법과 부정, 왜곡을 국가 발전이나 공공의 이익이란 이름으로 치장했다.

일부 국회의원은 또 어떤가. 뻔히 박근혜 체제를 만들고 조장하며 부추겼던 사람들이 아직도 생존과 영화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아예 어떤 논리도 없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들인가?

다만, 우리는 이들이 예외적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치의, 병원장, 총장, 어디 유명한 의원의 원장 그 누구라도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특히 그들이 보았고 익혔던 대로라면, 공무원과 국회의원도 무슨 대단한 생각을 했을 리 없으니, 그들이 맹신하는 ‘도구적 합리성’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노라 강변할 것이다.     

엘리트끼리의 협력과 적극적 참여, 또는 순치의 바탕이 되는 것은 당연히(!) 사익 또는 ‘확대된’ 사익 추구이다. 그중에서도 사익이되 공익처럼 속이고 속는, ‘우리’를 앞세우는 확대판 사익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 기관, 학교, 그룹, 지역 발전이라는 명분이 있으면, 그 어떤 사익 추구도 불가피한 필요악쯤으로 격상되거나 오히려 공익을 가장하기 마련이다.   

이화여대 총장은 학교 발전을 위해 할 수 없었다고 변명할 것이다. 서울대 병원장은 속으로 더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병원이 좀 더 많은 지원을 받으려면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지금 이 시대가, 이 나라가 그런 것을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처참한 국정 문란의 뿌리는 ‘개인’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조’다. 구조는 곧 되풀이하여 같은 사건을 일으키는 공통의 원인이 아닌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정치·경제·사회 ‘엘리트’를 둘러싼 구조가 이런 것이면, 비슷한 사태가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다.

되풀이 강조하지만, 그 뿌리를 뽑지 않고는 OO 게이트와 ‘부역’을 또 보게 될 것이며, 청문회며 촛불 집회도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뿌리 뽑는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철저하게 사적 이익에 기초한 엘리트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첫째다.

탄핵을 압박해야 하는 때에 더불어 새로운 권력 구조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멀리 미래도 중요하지만 당장 둘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 권한 대행이, 일부 언론이, 그리고 새누리당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라. 탄핵 과정과 기존 ‘엘리트’ 구조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새로운 권력 구조는 ‘어떻게’ 가능한가? 지금까지 축적한 것으로 보면, 백가쟁명, 백화제방이 불가피하다. 다만 한 가지, 에릭 올린 라이트가 <리얼 유토피아>에서 주장한 대로(권화현 옮김, 들녘 펴냄), ‘대항 권력’을 형성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데에 크게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대항 권력이란 단지 어떤 집단이나 조직을 넘어 “현재의 제도 속에 존재하는 유력한 집단과 엘리트의 권력 우위를 감소시키거나 무력화하는 여러 다양한 과정” 모두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것이 조직일 뿐 아니라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둘은 연결되어 있으니, 조직은 과정에서 분리될 수 없고 과정은 또한 흔히 조직으로 귀결된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항’이다. 완강한 사익 구조를 해체하는 데에는 대항 과정 없이 그럴 만한 권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촛불’의 구조와 과정, 지향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대항 권력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백만 삼백만의 규모뿐 아니라 ‘대항’으로서의 성격이 큰 의미가 있다. 얼마나 모였다는 외형보다는 왜 모이느냐는 이유와 동기가 대항 권력을 형성하고 실천하는 근본 에너지다.  

촛불로 상징되는 직접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대중의 동기는 사익이나 확대된 사익이 아니다. 사사롭게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힘없는 개인들이 모여 공(公)과 공익을 찾는 역설적 행동이 이만큼이라도 역사를 끌고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는 지금 검찰과 특검, 헌법재판소를 압박하지만, 동시에 병원과 학교, 관료체제에 진입한다. 회사, 공장과 지역사회에도 스며들 수밖에 없다. 그곳 모두를 장악하고 있는 부도덕한 엘리트 구조를 녹일 불씨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했다. 크게 살려야 한다. 

‘공화국’의 요체인 직접 민주주의를 멈출 수 없으니, 곳곳에서 새로 이야기하고 시도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다시 탄핵을 압박하는 새로운 민주적 권력이 될 것으로 믿는다. 더 많이 모이고 말하며 토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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