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 정병석 지음 / 시공사 펴냄, 2016년

[라포르시안] 주말의 광화문이 뜨거웠던가 봅니다.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 촛불을 들었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하긴 대통령 퇴진 요구는 어제 오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 대통령도, 바로 앞 전 대통령도 취임하자마자 퇴진을 요구하는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리 시대와 가장 가까웠던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을 분석한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에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는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1392년 창건되어 1897년까지 이어졌고, 고종 이희에 의하여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어 1910년까지 일본제국과 합방되기까지 519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1100년 동안 이어진 베네치아가 있지만, 공화국이었고, 왕국 혹은 제국으로는 1088년을 이어갔던 비잔틴제국이 최장수왕국이었고, 그 뒤를 992년의 신라가 있습니다만, 하나의 왕국이 500년 넘게 존속했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중국의 역사상 첫 번째 통일왕국이었던 진나라는 기원전 8세기 중반 비자(非子)에 의하여 주나라의 부속국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기원전 221년에는 시황제에 의하여 천하통일을 이루었지만, 불과 15년이 지난 206년에 한나라 유방에 의하여 멸망했습니다. 한편 고구려와 두 차례 큰 전쟁을 치른 수나라 역시 581년에 성립되어 589년에 중국대륙을 재통일하였지만, 619년에 멸망하였으니 39년 동안만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이은 주나라가 가장 오랜 왕국이었는데, 춘추전국시대에 해당하는 동주(東周) 시대를 제외하면 서주(西周) 시대는 275년에 불과합니다. 중국의 왕조는 대체로 300년 정도 존속했던 것입니다. 땅덩어리가 넓으니 야심가도 많아서 왕국을 이어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반면 조선은 땅이 넓지 않으니 감시를 피해 세력을 키우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터라서 왕실 안팎의 사정이 어지간하지 않으면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진 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결탁하여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신라와 고려가 망한 것은 지방호족이나 중앙의 특정세력이 힘을 결집할 수 있도록 통제하지 못한 탓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멸망은 일단 일본제국이라는 외세에 의한 침략이 핵심요인이라고 하겠는데, 외세를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자체 역량을 결집하지 못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는 조선의 멸망을 가져온 내부적 요인으로 불합리한 제도를 지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을 쓴 정병석교수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역학을 전공하고 행정고시에 수석합격하여 노동관련 정부부처에서 근무하다 노동부차관을 역임하였습니다. 퇴임 후에는 경제사와 성장론을 중심으로 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는 아니나 정부관료로 오래 일하면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멸망원인을 제도사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왜 어떤 나라는 가난하고 어떤 나라는 잘사는가?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남한과 북한의 현 상황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즉, 오랜 역사에 걸쳐 하나의 민족으로 같은 문화와 같은 언어를 가진 나라였던 남한과 북한이 오늘날 경제력에서 엄청난 격차를 보이는 이유는 제도의 차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와 MIT의 경제학, 정치학교수인 대런 애쓰모글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교수 등이 쓴 「장기 경제성장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제도」라는 논문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은 지리, 기후, 자원, 문화, 종교, 언어, 인종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하지만 오직 정치와 경제제도만 차이를 가졌던 것인데 경제적 성과에서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부사항을 챙겨보면 남북한 간에 정치와 경제제도 이외에도 상이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며, 그런 요소들이 경제적 성과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제도에 중점을 두는 경제성장론(즉, 제도론)의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남북한의 격차를 제도의 차이로 분석하는 것처럼 조선이 왜 쇠퇴의 길로 가게 되었는지도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7쪽)”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저자의 관점은 분명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처럼 서로 비교할 상대가 있는 경우하고는 달리, 조선처럼 비교할 상대가 마땅치 않은 경우에는 해석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중국 혹은 일본의 제도와 비교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은 저자가 조선사를 깊이 연구한 바 없으니 민족사관이니 식민사관이니 하는 특정한 사관에 치우침이 없다고 하였지만, 조선이 잘못된 제도 운용으로 결국은 멸망에 이르렀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식민사관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조선의 제도사를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중요제도에 담긴 경제학적 의미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제도의 변천과정을 기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기술방식에서는 때로 자신의 주장에 합치되는 부분만을 선택하여 해석함으로써 같은 제도라 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잘 들어맞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간과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루이14세의 프랑스왕국과는 달리 조선의 정체는 왕정이었지만, 정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왕은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또한 사헌부, 사간원과 같은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한 견제장치를 갖추어진 정부형태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에서 시행한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는 구조적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차적 요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선왕조를 움직인 기본철학은 성리학(性理學)이었습니다. ‘성명·의리의 학문(性命義理之學)’을 줄인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의리(義理)·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여 집대성한 것입니다. 성리학에서는 도교와 불교가 실질이 없는 공허한 교설(虛無寂滅之敎)을 주장한다고 이단으로 배척하였는데, 불교가 고려사회에 끼친 폐해가 크다고 본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권근의 이기심성(理氣心性)론을 보면, 군주 및 지배층의 덕치(德治)·예치(禮治)·인정(仁政)·왕도(王道)의 실천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밝히고 있는 것처럼 조선왕조 초기 성리학은 왕조의 통치철학으로 합당한 것이었지만, 왕조의 중심을 차지한 사림집단의 비중이 커지면서 점차 양반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대중을 포용하는 정신이 희박해지고, 실무보다는 허례에 매달리는 경향으로 흐르면서 사회구조가 유약해진 것으로 저자는 보았습니다. 

조선왕조의 지식계층은 고려시대에 세계최초로 개발한 금속활자를 개발한 선진인쇄술을 활용하여 지식의 확산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독점하는데 그쳤으며, 양반제도 및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4민체제 그리고 노비제도 등 착취적 신분제도를 운용한 것이 조선사회를 취약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양반들은 중앙 뿐 아니라 향촌에서도 아전 등 향리들과 결탁하여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여 일반백성들을 착취하는 존재였을 뿐 아니라 농공상등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 사회에 직접 기여하는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선왕조는 공업과 상업 활동을 억제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시행함으로써 부국강병의 길을 외면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 의복을 만드는 원료가 되는 뽕나무나 면화 등 특용작물의 재배와 분업 등을 통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일을 권장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농지가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을 터라서 식량이 아닌 특용작물을 재배하기 위하여 농지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도 지적하였습니다만, 조선왕조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였으며, 통일신라 이후로는 중국과 사대외교의 관계를 유지하여 군사적 충돌을 피함으로서 백성들의 군비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군비를 강화한다는 것은 중국에 시빗거리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 아닐까요?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조선을 유일하게 문명한 나라로 상대할만한하다고 인식하였던 것이 결과적으로 문약한 나라가 되고만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명나라와의 선린관계를 지키려다 신흥 청나라가 명나라와 대결하는 마당에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려다가 호란을 당한 사정은 당시 왕실과 조정대신들의 정책적 판단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이는 점입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왕조 안팎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현대적 방식으로 옛일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옳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세에 서구사람들이 조선의 존재를 몰랐다고 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고려 왕조까지만 해도 예성강 벽란도가 국제무역항으로 널리 알려져 대한민국을 코리아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이 동방항로를 개척하여 인도에 도착한 것이 1498년, 중국 광동에 도착한 것이 1513년입니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라비아의 상인들로부터 얻은 항로정보가 도움이 되었을 터입니다. 또한 아라비아상인들이 벽란도에 드나들었을 터이니 불과 200여년 만에 고려에 대한 정보가 깜깜절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대외교류중단 정책과 맞물려 조선 역시 외국과의 교류를 끊고 살았던 것은 정책적 오류였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저자는 조선이 성장할 수 없었던 이유를 경제성장론으로 설명합니다. 경제성장론에서는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려면 자본과 노동,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며 국가의 총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 등의 요인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선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작은 재정으로 움직이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대규모 공사를 벌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건설은 물자와 노동시장을 활성화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공사를 벌이려면 조세율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백성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니 비용-효과적 측면을 면밀하게 계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조선왕조는 상인과 기술자를 천시하는 등 상공업이 발전할 여건을 마련하기보다 오히려 상업 활동을 억제했다는 것이 정책적 실책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한 상업 활동에 관심을 가진 백성들이라고 하더라도 이윤을 얻게 되면 양반들의 착취대상이 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것도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저 자급자족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생산의욕을 북돋울만한 시장이 아예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자는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낮다고 말합니다. 경제적으로 성장해서 먹고살만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고 세상이 각박해지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과 행복한 것은 반드시 동행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선시대에 살았던 우리들의 선조들의 행복지수는 어땠을까요?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