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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이야기 - 10화] "말하자면, 저는 제 자신을 잃어버렸답니다"양현덕(하버드신경과의원 원장, Brainwise 대표이사)

[라포르시안] 의사 알츠하이머의 이름은 병명(알츠하이머병)에 담겨 널리 알려졌지만, 첫 번째 환자사례를 학계에 보고하기 전까지 그는 신경매독 및 혈관성 치매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알츠하이머병이 현대 의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에 이 장에서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명명의 기원과 추후 연구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풀어보려 한다.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lin, 1856~1926)= 에밀 크레펠린은 과학적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크레펠린은 정신질환을 증상에 따라 계통적으로 구분하려고 했으며, 종래 정신병으로 통칭되던 것을 조울증과 조현증(당시에는 조발성 치매 dementia praecox)으로 분류했다.

1902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프란츠 니슬과 함께 연구를 하고 있던 크레펠린은 알츠하이머를 자신의 연구팀에 영입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알츠하이머는 친구 니슬과 다시 상봉한다.

1903년 4월 정신병원 신축 작업을 이끌던 뮌헨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가 갑자기 사망하자 대학당국은 그 자리를 크레펠린에게 맡겼다. 크레펠린은 하이델베르크 연구팀을 동반해서 뮌헨으로 옮겼다. 알츠하이머는 수석연구원 직책을 맡았다.

1906년 4월 8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망한 아우구스테의 뇌 조직이 뮌헨으로 이송되었다. 알츠하이머는 노인반과 신경섬유농축체를 발견하고 크레펠린과 동료들에게 임상증상과 연결시켜 보고했다. 임상증상과 조직학적 소견을 연결시켜 분석하는 작업은 새로운 연구방식이었다. 크레펠린은 적극 격려하며 튀빙겐에서 열릴 제37차 남서독일 정신과학술대회에서 그 내용을 발표해보라고 권유했다.

최초로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환자 '아우구스테 데테르(Auguste Deter, 1850~1906)'

1906년 11월 4일 알츠하이머는 튀빙겐에서 아우구스테 데테르의 임상증상과 신경조직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학회의 좌장은 프라이부르크 대학교(University of Freiburg) 알프레트 호헤(Alfred Erich Hoche, 1865~1943) 교수였다. 호헤는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크레펠린의 정신질환 분류개념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알츠하이머가 발표를 하는 동안 크레펠린은 그 자리에 없었고, 발표를 마치자 호헤교수는 질의 응답할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고 즉각 차후 발표자로 순서를 넘겼다.

다음 주제는 정신분석에 관한 것이었으며 호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아주 길고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알츠하이머는 주목을 받지 못해 무척 낙담했다.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이름은 알츠하이머 본인이 붙인 것이 아니었다. 명명자는 바로 스승 크레펠린이었다.

크레펠린은 알츠하이머가 발견한 내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학회에서 보고한 아우구스테 데테르 증례를 1910년 발간된 정신의학 교과서 개정판에 반영하며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이란 명칭을 부여했다. 그 병명은 당시에는 초로기 치매(presenile dementia)를 지칭했으나, 후대에 의미가 확장되어 보다 흔한 형태의 치매인 노인성 치매(senile dementia)까지 통칭하는 이름으로 쓰인다.

알츠하이머를 포함하여 학자들은 뜻밖의 일에 적잖이 당황했다. 크레펠린이 아우구스테 증례를 이토록 신속하게 명백한 질환으로 정의하고 이름까지 붙인 것에 놀랐던 것이다.

사실, 알츠하이머가 발표하기 전에도 이 질환을 기술한 연구자들은 있었다. 크레펠린이 아우구스테 증례를 알츠하이머병이라고 명명한 데는 여러 가지 배경이 거론된다.

새로운 발견을 확대 과장함으로써 연구소의 명망을 높여 연구기금을 더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즉, 젊은 나이에 발병한 치매환자에서 조직검사를 통해 신경섬유농축체를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크레펠린 연구소는 큰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연구기금을 한층 더 많이 유치할 수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알츠하이머는 1894년 부유한 은행가의 미망인과 결혼하면서 아무런 부담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당시 크레펠린은 알츠하이머에게 정식 자리를 제공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무급으로 일했던 것이다. 크레펠린은 그런 희생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려면 기금이 안정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알츠하이머의 경제적 여유가 긴요한 역할을 한 셈이었다.

정치적인 배경도 제기된 바, 당시에 신경병리를 연구하는 두 학파가 있었다. 하나는 크레펠린이 이끄는 뮌헨 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아놀드 픽(Arnold Pick, 1851~1924)이 주도하는 프라하(Prague) 학파였다. 이 두 학파 간 경쟁 때문에 크레펠린이 빠른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알츠하이머가 보고한 병리소견은 노인반과 신경섬유농축체 등 두 가지였다. 그 중 하나인 노인반은 프라하 학파 소속 오스카 피셔(Oskar Fischer, 1876~1942)가 노인성 치매환자에 관한 예증에서 이미 여러 번 언급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테 데테르 진료기록의 재발견= 1909년 이후로 볼 수 없었던 알츠하이머의 아우구스테 관련 진료기록이 87년 만인 1996년에 발견되었다. 그 내용을 여기에 일부 소개한다.

"이름이 무엇인가요?"
"아우구스테입니다."
"성은 무엇인가요?"
"아우구스테입니다."
"배우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주저하다가) "아우구스테입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51세입니다."
"어디에 사세요?"
"우리 집에 오셨었군요."
"결혼은 하셨는지요?"
"헷갈리네요."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요?"
"여기 저기요,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요?"
"지금 당신이 있는 장소는요?"
"거기에서 살 거에요."
"당신 침대는요?"
"그게 어디에 있어야 하지요?"

아우구스테는 점심으로 돼지고기와 양배추를 먹고 있었다.

"지금 뭘 드시고 계신가요?" 
"시금치요." (그녀는 고기를 씹고 있었다)
"지금 드시는 게 뭐죠?"
"조금 전에는 감자를 먹었고, 지금은 고추냉이를 먹고 있어요."
"숫자 5를 써보시겠어요?"

('여자'라고 적는다)

"숫자 8을 써보시겠어요?"

자기 이름을 적는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저는 제 자신을 잃어버렸답니다"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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